[시애틀 수필- 박보라] 악어로 변신
- 25-11-16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장)
악어로 변신
그날 아침, 내 왼쪽 눈은 감기지 않았다. 거울이 세로로 쪼개진 듯 양쪽이 다르게 보였다. 얼굴의 반만 처졌던 눈꼬리가 다시 올라가고, 이마의 잔주름도 사라졌다. 팽팽해진 피부에 잠시 감탄하다가 다시 감기지 않고 동그랗게 뜬 눈을 쳐다봤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 봐도 움직이는 건 하나뿐이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얼른 남편을 불렀다. 그런데 이번엔 입술이 반만 움직여 발음이 이상해졌다. 그제야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봤다.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병원에 가니 바이러스로 인해 신경이 손상된 것이라고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해 줬다. 한의원에선 찬 기운으로 인해 안면 마비가 온 것이라고 당분간 침 치료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골든타임인 삼 일을 넘기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취한 내게 스스로 칭찬하며 금세 괜찮아질 거라고 위안했다. 하지만 그 위안은 점점 질문으로 바뀌었다. 언제 돌아올까? 혹 안 돌아오면 어쩌지? 한의사의 지도에 따라 안면 근육 이곳저곳을 세심히 움직이는 연습을 했다.
그날부터 욕실 거울 앞에 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반쪽 얼굴을 보며 열심히 휘파람을 불었다. 입 주변 근육이 돌아오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 그 행위 하나로 다 나았다는 걸 알 수 있단다. 항바이러스제를 다 먹으면 돌아오겠지 했지만, 회복은 더뎠다. 역시 한방이 답인가 했지만, 그 또한 속히 결과를 내지 못했다.
신경이 손상되었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이다. 교회 예배도 벽으로 막힌 미디어 실에서 드려야 한다. 큰 소리가 귀에 날카롭게 꽂혀서다. 그래서 찬양 시간엔 신경 손상을 입은 귀를 막고 비교적 소리가 막힌 공간에서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옆자리에 두고 오랫동안 이야기하지 못한다. 고개를 자꾸 돌리면 멀미가 나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귓속 전정기관에 문제가 생긴 탓일 거다.
흔히 입이 돌아간다고 하는 안면 마비 증상을 신경이 다친 쪽이 삐뚤어지는 거로 생각하는데 그 반대였다. 신경이 다쳐 마비가 오니 반쪽은 아예 움직이지 않아 마네킹처럼 된다. 그중 제일 신기한 건 얼굴의 모든 주름이 펴지는 것이었다. 그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주름살 하나 없이 젊어진 것 같다고 말했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눈동자가 건조해지는 걸 막기 위해 뜬 눈을 수동으로 감겨야 했다. 평소 우리가 얼마나 자주 눈을 깜빡이는지 깨달았다. 잠잘 땐 눈이 감길 수 있도록 테이프를 붙였다.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재밌다고 웃었다. 갑자기 찬 데서 자면 입 돌아간단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일이 있기 전날, 집이 좀 추운 것 같아서 히터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남편이 뭐가 춥냐고 타박했던 기억도 함께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건강한 삼십 대에게 구안와사가 온 것은 분명 그 이유밖에 없었다. 그제야 남편은 미안했는지 집안 온도를 따뜻하게 올려줬다. 공들여 치료한 덕일까. 삼 주 정도 지난 어느 날 아침, 드디어 휘파람을 불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스트레스받거나 혹은 날이 추워지면 왼쪽 얼굴이 뻐근하고 불편하다. 그럴 땐 얼른 따듯한 곳에서 쉬어야 한다. 남편은 가을서부터 봄까지 실내 온도를 항상 따뜻하게 유지하도록 히터를 튼다. 생전 안 쓰던 스카프를 꺼내어 두르고, 가끔 털모자를 쓸 때도 있다. 교회에서 반주할 때도 스피커를 피해 피아노를 놓고, 고개를 한 방향으로만 돌릴 수 있게 자리를 조절한다. 그렇게 모든 삶에서 재배치가 일어났다.
오랜만에 만나 함께 밥 먹던 친구가 날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도 함께 갸우뚱했다. 그런데 자꾸 이유 없는 눈물이 흘렀다. 냅킨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가며 겨우 밥을 먹었다. 다음번에도, 그다음 번에도 반복된 경험을 하고 나서야 또 다른 부작용을 발견했다. 특히 뜨겁고 매운 음식을 먹을 때 한쪽으로만 눈물을 흘린다는 것. 연기자도 아니고 이런 고급 기술을 자동 습득하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할까.
잠시 눈을 감자, 내가 나일강에 사는 악어로 변신했다. 사람을 잡아먹으며 눈물을 흘린다. 아, 사냥 후 먹잇감을 씹어 먹으며 죽음에 대한 슬픔을 느끼는 거구나. 고대 사람들은 악어의 눈물을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슬픔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경과 침샘을 자극하는 신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먹이를 먹을 때 자동 반사로 눈물이 흐르는 거다. 그리고 안면마비의 후유증으로 오는 이 증상을 악어의 눈물 증후군이라고 한다.
밥 먹으며 한쪽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만나거든 가증스러운 가짜 눈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 주기를. 그들은 결코 음식이 된 재료를 안타까워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니까.
식당 티브이에서 한 연예인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사십 분 동안 눈물로 호소했다. 과연 그건 진심일까, 아니면 연기일까. 신뢰가 사라진 요즘, 슬픔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최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돌다리를 열심히 두들기며 건너도 물에 빠지는 세상이다. 뉴스에도 거짓, 사기, 위선, 허위, 위조, 속임수, 기만, 가짜 등의 단어가 서로 머리채를 잡고 줄줄이 따라 나온다. 그 뒤엔 항상 조심하라는 경고가 덧붙는다. 스스로 살피지 않으면 악어의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연기대상을 받았던 그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차라리 나처럼 안면마비로 인한 후유증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죄다 잡아먹고 사냥꾼에게 잡혀 싸구려 지갑으로 재탄생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나를 바라보는 친구의 눈 속엔 여전히 궁금증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민망해서 식당 구석에 놓인 티브이로 눈길을 돌리며 말한다. 아, 이 식당 요리사는 솜씨가 참 좋네. 오늘도 순두부찌개를 먹으며 연신 눈물을 흘린다. 내 처지에 대한 연민, 맛에 대한 감격이 줄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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