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목 회장의 6ㆍ25전쟁 참전기-1] 전쟁 발발 2개월 뒤 18살 나이에 군에 입대하다

윤영목(서북미 6ㆍ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됐던 6ㆍ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도 7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6ㆍ25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청년들도 이제는 80~90대가 되면서 대부분 참전 용사들이 하늘나라도 떠나고 생존해 있는 용사들이 크게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조국인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번영은 없었을 것입니다. 

올해 만 90세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윤영목(병충학 박사) 서북미 6ㆍ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이 생생한 한국전 참전기를 보내와 시리즈 형태로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애독을 당부 드립니다. /편집자註 


6ㆍ25전쟁 참전기(1)

 

전쟁 발발과 입대(1950년 8월)

 

올해는 6ㆍ25전쟁 발발 71주년이 되는 해이다. 3년1개월 동안 계속된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남북 쌍방이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폐허로 변해버렸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총성은 멈췄으나 한반도는 다시 남북으로 갈라진 채 68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필자는 전쟁 발발 2개월후인 1950년 8월에 만 18세 나이로 그 당시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포병단에 자원 입대했다. 간부후보생 모집에 응시하여 그해 9월에 부산 동래소재 전시사관학교로 알려진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3개월간의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친 후 같은 해 12월 자랑스러운 육군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포병 제18대대(1950년12월~)

(1)부대 재편성

 

북한 전역으로 진격했던 국군과 UN군이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전선 일대에서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철수작전이 계속되고 있었던 때였다.

필자는 그 당시 평안북도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구 근교 진량에 철수해있던 포병 제18대대에 배속되었으며 C포대 지휘소대장으로 임명됐다.

지휘소대장의 주 임무는 관측반과 측지반을 관장하며 예하 2~3명의 관측장교와 더불어 일선 보병부대에 파견돼 포병지원사격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지휘 소대장 앞으로 지프차가 배당된 것이다. 생후 처음으로 내가 필요할 때 수시로 사용할 수 있는 차를 갖게 됐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자동차 운전을 배울 수 있었으며 그때 배운 운전기능을 70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충분히 잘 활용하고 있다.

파죽지세로 남하해온 중공군은 드디어 서울까지 점령하게 되었으나 그들의 보급로가 연장됨에 따라 공격태세도 자연히 느슨하게 되고 이때에 재편성된 UN과 국군의 일대 반격이 개시됐다. 필자 부대도 의성을 거쳐 안동의 한 국민학교 교사에 주둔하면서 병력보충과 화포와 물자 보급을 받고 있었다. 

(2)탈영병 직결처분 사건

이때에 필자 포대(중대)에서 탈영병 사건이 발생했다. 이 탈영병은 보충병으로 입대한 신병으로 경상북도 상주가 고향이었다. 포대장은 즉시 선임 하사를 탈영병 고향인 상주에 보내 탈영병을 체포해올 것을 명령했다. 선임하사가 상주집에서 탈영병을 붙잡아 부대에 복귀하자 간이 재판이 열렸으며 대대장은 신병이고 초범임을 고려해 처벌대신 훈계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얼마 후 이 병사는 또다시 탈영했으나 대대장의 관대한 처분으로 두 번째 탈영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같은 탈영이 3번째 반복되자 대대장은 직결처분권을 발동해 부대 뒤쪽 야산에 전부대원을 소집하고 그 앞에서 하사관 6명에 의한 총살형을 집행했다. 처음 목격하는 총살형 장면에 흐느껴 우는 병사들이 있었고 필자 역시 전쟁을 실감할 수 있는 엄숙한 광경을 경험한 바 있다. 그후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이 병사는 소집 직전에 결혼한 아내와 홀어머니를 잊지 못해 탈영을 했다고 한다. 전쟁이 낳은 한토막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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