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잡고 갈까 그냥 갈까
- 21-02-08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잡고 갈까 그냥 갈까
백마의 힘찬 발길질에 앞서 달리던 흑마가 여지없이 넘어지고 만다. 와아, 잡았다. 아이고, 잡혔네. 한쪽에선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힘이 쑥 빠진다.
다시, 이번에는 반드시 백마를 잡고야 만다. 숨을 고른 흑마가 출발점으로 돌아와 매서운 눈초리로 갈 길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출발하자 마자 맹렬한 속도로 백마의 뒤를 바짝 쫓는다. 백마가 전력 질주로 흑마를 따돌리려 하지만 흑마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어, 앞서가던 백마가 갑자기 획 뒤로 돌아서 흑마를 향해 돌진해온다. 느닷없는 역공에 표정들이 제각각이다.
윷놀이가 한창이다. 바깥에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방안은 윷놀이 판의 열기로 후끈후끈하다. 윷가락들도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며 오랜만에 세상 구경한다고 한껏 들떠 있다. 흑백의 바둑돌을 말로 삼아 말길을 달리며 잡고 잡히는 윷놀이는 짜릿하고도 아슬아슬한 재미가 그만이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놀기에 이만한 게 없다.
오래 전, 이민 가방을 꾸리는데 내놓은 물건들 틈에 끼어 있는 윷이 눈에 띄었다. 민속놀이 하나쯤은 아이들에게 알려줘야겠다 싶어 다시 집어 들었다. 하마터면 버려질 뻔했던 윷이 우리 집에 이토록 즐거움을 안겨주다니, 그때 남편 눈치를 보며 가방 한 쪽에 슬쩍 집어넣길 잘했지 싶다.
내 차례다. 윷이야! 네 개의 윷가락이 모두 배를 드러낸 채 기분 좋게 착지에 성공했다. 드디어 윷이다. 반가움과 탄성도 잠시, 윷판을 가운데 두고 눈치작전과 함께 고민이 시작된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 날카롭게 부딪힌다. 선택의 순간이다. 네 칸을 가서 앞에 있는 백마를 잡고 갈 것인가. 아니면 내 길을 그냥 갈 것인가. 또랑또랑한 눈동자들이 내 손 끝에 집중하고 있다. 참으로, 승부의 세계란 냉정하기 짝이 없다.
와, 빽도다! 남편이 던진 판에서 뒷도가 나왔다. 윷에 잡혀서 떨어져 나온 말을 곧바로 참머리(출구)에 놓으며, 이런 수도 있다고 싱글벙글한다. 아, 잡지 말고 그냥 갈 걸. 초반에는 흑마가 먼저 날 것 같더니만 이젠 패색이 짙다. 갈 길이 먼데 던지는 가락마다 나오는 것은 도와 개뿐이다. 결국 흑마는 한 걸음 한 걸음 또박또박 걸어서 결승점을 통과했다.
윷판이 마치 세상살이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땅에서 말처럼 달리는 것만도 벅찬데, 지난해는 소용돌이치는 바다에서 겨우 헤쳐 나온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또 달려가야 할 말길이 펼쳐져 있다. 새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잠시라도 숨을 고르며 생각의 고삐부터 잡아야겠다. 말을 부릴 것인가 말이 되어 달릴 것인가. 돌이켜 보면, 말을 부리기보다는 내가 말이 되어 달린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둘을 분별하지 못해 코앞에 닥친 상황에만 급급해 하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마음 가운데 든든한 기둥 하나 세워두고 좀 더 깊이 생각하며, 좀 더 멀리 바라보아야 했다. 달리는 말이 아니라 말을 부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마음을 쏟아야 했다. 세상살이가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다고 마음마저 말처럼 날뛰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잡고 갈까 그냥 갈까. 쉽지 않은 결정의 순간들이 길목마다 기다리고 있다. 윷놀이 판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경쟁이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야 오죽할까. 하지만 잡히지 않으려고 먼저 잡는 수를 두기 보다는 그냥 가고 싶다.
소(윷)처럼 가다보면 운 좋게 업고 가는 수도 있고, 때론 지름길을 만나는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다 잡히기도 하고 윷가락이 밖으로 굴러 낙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먹기 나름이다. 잠시 쉬어 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다른 길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열심히 응원해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속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꼴찌가 되어도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가면 되는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는 세상이다. 갈 길이 멀다. 나라는 나라대로, 나는 나대로. 윷판을 정리하며 돼지(도)와 개(개), 양(걸)과 소(윷)와 말(모)이 어울려 한 곳을 향해 사이좋게 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사람들은 그렇게 함께 갈 수 없는 걸까.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해도 마음을 모으면 윷판 같은 세상, 신명나게 한판 놀 수 있지 않을까.
소의 해다. 잡지 않고 그냥 가는 윷(소)의 여유를 가진 한 해가 되길 바라며, 다시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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