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정동순] 썩을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썩을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향이 그윽한 오솔길을 걸었다. 젖은 바위와 수분을 머금은 토양에서, 부엽토에서 꿉꿉하면서도 깊고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굳이 어싱(earthing)이란 말을 빌려 오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했다. 

오, 버섯이다! 드러누운 나무 둥치에 무리 지어 탐스럽게 자란 느타리버섯을 발견했다. 얼마 전, 흠뻑 내린 비에 버섯 포자가 맘껏 싹을 틔웠을 것이다. 가을이면 지인들에게 송이버섯을 얻어먹긴 했지만, 직접 식용 버섯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문우와 함께한 산책길인데 귀한 자연산 버섯까지 찾다니 더없이 좋았다. 허리에 걸쳤던 옷을 묶어 버섯을 탔다. 물기를 머금은 버섯은 꽤 무게가 나갔다.

집에 와서 버섯을 펼쳐 놓으니, 남편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버섯 잘못 먹으면 죽는다. 그의 말에 기가 팍 죽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틀림없는 느타리버섯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맛있다는 방법을 총동원해 버섯을 요리했다. 찜찜해하는 남편을 위해 기미상궁을 자처했다. 소인이 먼저 먹을 테니까, 점심때까지 괜찮으면 그 때 당신도 드시옵소서. 음음.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버섯은 사실 나무가 썩을 때 작용하는 균들이라고 한다. 낙엽이 많이 쌓인 곳이나 오래된 나무 둥치를 먹고 자라는 낙엽 부후균이 물질을 썩히는 과정에서 몸에 좋은 버섯이 된다. 알면 알수록 생태계에서 버섯의 역할이 새삼 대견하다.

나는 거창한 환경론자는 아니지만,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나뭇잎, 잡초도 버리지 않는다. 음식물 쓰레기는 퇴비로 만들고, 긁어모은 낙엽으로 텃밭을 덮어둔다. 그러면 겨울 동안 잡초도 자라지 않고 봄이 오면 흙과 섞어 퇴비로 쓸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 음식물 찌꺼기 묵힌 것과 낙엽 썩힌 부엽토를 섞어 거름을 만든다. 잘 썩힌 것들로 텃밭은 기름지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텃밭에는 항상 지렁이가 우글댄다. 

이런 친환경적인 텃밭 농사 덕분인지 뜻밖의 기쁨을 얻기도 했다. 어느 해, 벌레 먹은 사과를 모아두었던 텃밭 귀퉁이에 못 보던 생명체가 출현했다. 뭔가 쑥쑥 올라오더니 이상하게 생긴 버섯이 무리 지어 자라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귀하다는 모렐 버섯이었다. 감사하게도 그해에 세 번이나 수확하는 기쁨을 누렸다. 

썩는 일은 자연스럽다. 썩는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순환이다. 생명의 활기가 넘치던 개체도 수명이 다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균들로 자신의 몸을 분해시켜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기꺼이 다른 생명체가 살아갈 영양분이 된다. 미생물이나 균처럼 필요 없는 것 같은 존재도 생태계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몇 년 전, 대영박물관에 갔을 때, 영생을 꿈꾸며 썩는 걸 거부했던 미이라를 보았다. 썩지 않아서 후대에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육체였다.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은 잘 썩는 것이다. 썩지 않는 것들은 환경을 위협한다.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바다를 덮고 다른 것들을 죽인다. 

썩는 것을 막는 것은 자연이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수확한 지 3주나 되도록 아직 싱싱한 상추가 상점의 진열대에 있다. 무슨 짓을 했기에 아직도 상추가 저리 빳빳하게 잎을 세우고 있을까? 상추도 생명이라면 밑동이 싹둑 잘려 하얀 진액을 흘리고도 고통을 견뎌야 하는 상추의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어떤 빵은 일주일이 안 되어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는데 어떤 빵은 3주가 지나도 곰팡이 하나 피지 않는다. 하지만 썩지 않는 빵 앞에서 알 수 없는 방부제 성분이 내 몸에 들어가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까 몸을 움츠린다.  

썩을 것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예전의 어른들은 ‘썩을 ~들’이란 욕을 내뱉곤 했다. 요즘에 거의 들을 수 없는 그 욕이 가끔 생각난다. 흙을 밟고 자랐던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철학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욕이다. 

썩어야 하는 것은 자연에 속한 일만이 아니다. 속이 문드러진다, 속 썩인다는 말도 자주 하지 않은가. 썩는 일은 일상에 늘 가까이 있다. 사소한 일에도 수시로 들끓는 불순한 내 감정도 고약한 냄새 없이 매일 삭혀지고 순하게 썩어갔으면 좋겠다. 모처럼 발견한 자연산 버섯을 통해, 썩는다는 말을 질서의 순환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자주 떠올리는 계절이다.

잘 썩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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