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소설-서로빈] 달걀 나무
- 25-01-01
서로빈(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달걀 나무
하진은 화면에 적힌 잔고를 확인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과일 도시락 배달업으로 뜻밖의 큰 수익을 거두고 있다. 이 일의 가장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은 새벽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는 출근하거나 장사 준비를 시작하시는 분들. 본인이 직접 주문하는 일은 없지만 그분들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주문해 준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과일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이들이 이윽고 잠에 취할 때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신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아이를 위해, 친구를 위해 주문한다. 처음에는 좋은 과일을 좋은 가격에 구하는 게 힘들었는데, 두세 곳의 농장과 거래를 튼 이후엔 언제든 안정적으로 과일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안도감의 틈을 비집고 하진의 마음속에 단골손님인 진서가 떠오른다. 어쩌면 ‘이었던’. 진서가 주문을 안 한 지 얼마나 됐더라. 진서는 처음에 아이 학교로 선생님 열 분께 드릴 과일 도시락을 배달해 달라고 주문했다. 며칠 후 선생님들께서 하나같이 다 좋아하셨다는 인사를 건네며, 변호사 사무실로 두 번째 배달 주문을 해왔다. 그 다음엔 회계사 사무실, 요가 스튜디오, 생일 파티가 열릴 아이 친구의 집 등, 이 인근 각양각색의 장소로 주문을 넣어주는 진서 덕분에 새로 찾아온 손님도 적잖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목소리만 들었음에도 고마움과 친밀감에 복받쳐 ‘A 초등학교_10개’, 첫 주문내역으로 저장해 놓았던 연락처를 ‘양진서 고객님’으로 바꾼 지 하루 만에 진서는 또 주문을 해주었다. 늘 열 개나 스무 개씩 주문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딱 한 개만 주문했다. 면역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는 환자에게 보내는 것이니 자몽, 오미자, 석류는 넣지 말아 달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하미과를 골랐다. 다양한 손님에게 다양한 과일을 보낸 결과, 몸이 아플 땐 대체로 산미가 많은 과일을 기피하고 수분이 많은 과일을 선호한다는 걸 배웠다. 그렇다면 박과 열매가 제격이다. 그중에서도 하미 멜론의 달콤한 향기는 가라앉은 몸과 마음을 끌어올려 준다.
하진은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가장 번잡한 곳에 자리 잡은 작고 노란 이층집의 하얀 대문 앞에 상자를 놓으며, 환자가 머문다고 했는데 여기가 맞나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진서가 한 번도 주문하지 않으면서 하진의 마음은 이제 ‘불신전의’로 가득 찼다. 내 과일 때문에 환자의 상태가 악화된 걸까, 내 과일 때문에 진서와 환자의 관계가 틀어진 걸까.
-양진서 고객님-
석 달 만에 화면에 나타난 진서의 이름을 보며 하진은 긴장했다. 따지려는 걸까, 안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걸까, 그저 주문하려고 전화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 텐데. 하진은 허무맹랑한 자신을 탓하며 전화를 받았다.
찾아오겠다는 진서의 말에 하진은 어리둥절했다. 반드시 만나야 할 용건이 무엇일까, 주문은 늘 그랬듯 전화로 할 수 있고, 불만도 전화로 말할 수 있고, 환불을 원하면 송금해 줄 수 있는데.
진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하진에게 화분부터 내밀었다.
“이거 드리고 싶어서 찾아뵌 거예요.”
넝쿨에 달걀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맨 달걀이 아니라 갖가지 그림이 그려진 오색찬란한 달걀들.
“세상에 달걀 나무가 다 있네요? 이걸 어찌하여 제게 주시는지….”
“좀 긴데 이야기 들어줄 수 있으신가요?”
“20분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네, 얼른 말씀드릴게요. 저번에 주문드린 거긴 은사님 댁이었어요. 신장 이식 수술하셨는데 하필 저도 녹내장 수술을 받아서 찾아뵙지는 못하고 과일만 보내드렸어요.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안부를 여쭈었는데, 계속 답이 없으셨어요. 평소에도 읽기만 하시고 답은 잘 안 주시는데 몸이 불편하시면 더 안 하시겠지, 하던 게 두 달 반이 넘어가면서 걱정됐어요. 그래서 장거리 운전할 수 있을 만큼 시력을 회복하자마자 지난주에 아이 데리고 찾아뵈었어요. 메시지 드렸으니 오는 줄 아시겠지 했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으시더라고요. 병원 가실 때 말고는 늘 댁에 계시거든요. 병원 가셨더라도 간병하시는 선생님 계실 텐데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앞뜰에 다 찌그러진 과일 상자가 보였어요. 과일 보내드렸던 날부터 이미 비어 있던 모양이에요.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중에, 아이가 저를 불렀어요. 한 켠에 작은 식물 세 그루에 더 작은 멜론이 몇 덩이씩 열려 있었어요. 여전히 어떡할지 모르겠기에 우선 그걸 파와서 화분에 심었어요. 어제 보니 아이가 멜론마다 온통 그림을 그려놓았더라고요.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장님 도시락에서부터 자란 거니까 한 그루 드려야겠다 싶었고요… 그리고…”
“네, 말씀하세요.”
“그날 배달하시면서 뭐 보거나 들은 게 있으신지 여쭤보려고요.”
“글쎄, 전 우선 환자께서 그렇게 복잡한 곳에서 회복하시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었고…”
“어!”
“네?”
“선생님이에요!”
딸네 다녀왔다.
“아이고, 천만다행이네요.”
하진은 진서가 내민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 얼른 선생님께 가볼게요. 감사드려요!”
-양진서 고객님-
다음날 하진은 다시 진서의 전화를 받았다.
“청설모였어요.”
“네?”
“선생님께도 이거 선생님 나무라며 한 그루 드리니까, 이 달걀들은 웬 거냐 하셔서 같이 대문이랑 담장에 설치된 방범 카메라 돌려봤거든요. 청설모 한 마리가 상자 속 멜론을 다 먹고, 깊이 박혀 있어서 미처 발라지지 못했던 씨앗을 구덩이에 모아놓은 거예요. 어찌나 양지바르고 비바람 잘 드는 땅을 골랐던지 삽시간에 쑥쑥 큰 거죠. 자기가 심은 건 줄 알았나 봐요. 아이와 제가 나무를 가져가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하나 따먹으려고 기를 쓰며 잡아당기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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