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대로] 가정 교사

이대로(서북미문인협회 회원)

 

가정 교사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는 주경야독을 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댈 터이니 학비 걱정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홀어머니의 간절한 당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전답을 담보 잡아 빌린 돈으로 1학년을 마쳤다. 계약서대로 3년이 지나도록 갚지 못하면 전답 문서는 넘어가게 되어 있다.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농사 지은 것으로 빚을 갚은 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돈을 빌릴 때부터 이미 이전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어머니다.

그래도 기꺼이 포기하는 어머니!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절실함과 훗날 성공해서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희미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고민해 보았지만 열아홉 살 청년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할 확신이 없었다. 자신도 없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도 먼저 마치고 보자는 계산으로 휴학했다. 군대는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철도 들기 시작한다. 고향이나 애인 등 온갖 잡생각 떨쳐버리는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밑도 끝도 없이 호된 기합을 주고 나서 고향 쪽을 향해 묵념하라고 할 때, 방향을 몰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 강철같은 청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고 그것을 억제하느라고 이를 악물고 그냥 눈을 감아야 했다. 그 눈물 속에 정화수 떠 놓고 비는 어머니를 보았다. 군대 생활 3년 내내 고향과 어머니를 생각했다.

내 학비 때문에 더는 전답을 없앨 수는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추고 제대했다. 야간으로 적을 옮겼다. 열등감이나 수치심 따위는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아무리 기웃거리고 두들겨 봐도 일자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졸업장은 취업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알바’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촌놈 학생이 가질 수 있는 부업으로는 오직 가정 교사와 신문 배달뿐이었다. 신문 배달로는 전혀 타산이 맞지 않았다. 학비는 고사하고 자취비도 되지 못했다. 학생 집에서 기거하면서 하는 가정교사 자리가 가장 이상적이다. 그것이 전업이어야 하고 학업은 부업이 되어야 했다.

동네 약방 전화번호를 빌려서 신문에 광고를 냈다. 몇 살이냐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로 시작해서 고향이 어디냐를 끝으로 첫 인터뷰를 잘 받았다. 생각해 보고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같았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채용이 되면 어떻게 해야 잘하는지 아는 선배에게 자문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알려주겠다던 전화 응답은 없었다. 또 광고를 냈다. 전에 가졌던 인터뷰를 재조명해 보는 동안 번쩍이는 섬광을 보았다. ‘어쩌면 고향이? …’

다음 전화 인터뷰에서는 물어보기 전에 고향을 먼저 말했다. 대면 면접에서, 어찌 묻지도 않는 답을 그것도 맨 먼저 했느냐고, 무슨 이유라도 있느냐고 했다. 또 걸림돌이 되려나 싶어 내심 섬뜩하기도 했지만 이미 엎어놓은 물이기에 맘 편히 앞서 있었던 전화 인터뷰를 상기시켰다. 사투리를 쓰지도 않는데 고향을 속일 수도 있지 않으냐고,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다고 했다. 고향에는 어머니가 있고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어머니를 바꾸면 되겠냐고 대꾸했다. 어디면 어떠냐고 잘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위로와 격려에 더 잘해야겠다고 꿀꺽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때의 그 결심이 나 자신을 감명받게 하였고 지금까지의 내 인생 행로에 길잡이가 되고 있다.

천행으로 집에서 숙식까지 받는 특급 가정 교사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몇 주 가지 못했다. 덩치도 나보다 큰 학생은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며 가끔 마당에 나가서 연습하곤 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있었다.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다. 그럴수록 더 거칠어지고 한 판 붙어 보자고까지 한다. 어렵게 잡은 일자리를 잃기가 싫어서 참고 또 참으면서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만 결국에는 내가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 판 붙자고 제안했다. 널찍한 뒷마당에서 레슬링 챔피언전을 방불케 하는 대격전을 벌였다. 부잣집 귀염둥이의 오만과 태권도 훈련으로 연마된 체력도 객지와 군대 생활을 통해 굳어진 정신력을 꺾지 못했다. 

무릎을 꿇더니 잘못했다고 사나이답게 용서를 빌었다. 대문을 나서는 나를 부모가 막아섰다. 방안에서 다 보았다면서 가정 교사로서가 아니고 가게 일도 도와주면서 그냥 같이만 있어 달라고 했다. 생각 밖의 호의에 박절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공부하라고 안 할 테니 잘해 보자며 악수했다.

사 년이 지난 어느 날 사무실에 웬 남자가 와서 선생님을 찾는다며 내 이름을 댔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준 동료 직원은 전에 선생이었느냐며 의아한 눈길을 감추지 못했다. 나 또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기에 전혀 뜻밖이었다.

“방황도 많이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 이것 때문에…” 

차곡차곡 접힌 종이쪽지를 지갑에서 꺼냈다.

“이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 보기 바란다…”라고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간단하게 써서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었던 쪽지였다.

군대에 가기 전에 인사하러 왔다는 인영이는 자기를 사람 만들어 준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저의 영원한 가정교사가 돼주십시오. 철이 들어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그의 떨리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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