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풀꽃 편지
- 24-12-27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풀꽃 편지
둥근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오종종히 모인 사람들, 말없이 건네는 미소가 정겹다. 앳된 얼굴의 젊은 엄마에서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까지, 두어 달 동안 매주 모여 한솥밥을 먹으며 삶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던 이들이다. 서로의 어깨를 내주며 함께 위로를 주고받던 따뜻한 기억 때문인지 다들 종강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테이블 한쪽에 낯선 봉투가 쌓여 있다. 모양과 크기가 각각인 봉투의 정체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얼른 보기에 모인 사람의 숫자보다 하나가 부족하다. 늘 하던 대로 한 주간의 삶을 나눈 다음, 리더가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 펼친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써 내려간 남편의 편지다.
영문을 몰라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 쳐다보는데, 리더의 차분한 음성에 실린 남편의 마음이 강물처럼 잔잔히 흐르기 시작한다. 물줄기가 안으로 흘러든다. 어떤 이는 믿기지 않는 듯 계속 눈을 껌뻑이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가만히 휴지를 건네는 이도 있다. 하나씩 둘씩 눈가에 손이 올라가고 코끝을 훔치기도 한다. 어느새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읽고 난 편지를 전해 받는 아내의 손길이 파르르 떨린다. 두 손으로 받아 가슴에 안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품는 듯하다. 편지지가 없어서 급히 공책에 썼노라고 겸연쩍어하는 남편의 마음이 종이 위에 그어진 선만큼이나 촘촘히 배어난다. 아무렴 종이가 문제일까. 편지의 향기가 이리 깊은데. 예쁜 카드를 받아 든 젊은 엄마의 얼굴에 발그레한 꽃이 피어난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마음에 새긴다.
마지막으로 노란 서류봉투다. 두 장의 A4용지가 수줍은 듯 손에 이끌려 나온다. 책갈피에 들어 있다가 막 나온 듯한 풀꽃 하나가 보인다. 새끼손가락의 두 마디쯤 되는 노란 풀꽃을 흰 종이 한가운데 놓고 유리 테이프로 붙이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들 감탄사를 발하는데, 누가 손가락으로 편지를 가리킨다. “꽃보다 아내.” 가녀린 풀꽃 아래 아내를 향한 그의 마음이 새긴 듯 씌어 있다. 또 한 장엔 글이 빼곡하다. 한 자 한 자를 붓으로 쓴 것처럼 정성이 고스란히 읽힌다. 며칠 전 이유없이 서류봉투를 찾는 남편이 좀 수상쩍긴 했다. 다른 이의 편지를 내 것같이 듣고 내 편지가 모두의 것인 양 나누는 사람들, 편지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남편이 붙여준,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들의 이름은 아내였다.
다들 꽃향에 취해 있는데, 누가 와서 편지 한 통을 전해 준다. 이제야 봉투와 사람의 수가 맞다. 리더의 남편이 출장을 떠나면서 부친 편지가 적시에 배달되어 그에게 전해졌다. 아무도 모르게 편지 이벤트를 준비하는 아내의 상황을 눈치챈 남편이 전날 밤에 카드를 써서 아침에 아내 몰래 우체통에 넣고 떠났다. 그의 아내답고, 그녀의 남편답다. 그녀의 볼에 흘러내리는 굵은 눈물방울과 사려 깊은 남편의 마음에 모두 감동하며 함께 눈물을 닦는다. 남편의 진심이 담긴 편지 한 장으로 겨울 정원 같았던 아내들의 가슴에 갑자기 봄이 찾아왔다. 꽃대가 오르고 꽃이 피어난다.
“꽃보다 아내”라는 편지로 ‘낭만쟁이’라는 별명을 얻은 남편은 아내와 손을 잡고 가게로 달려갔단다. 새로 산 액자에 꽃 편지를 넣어 침대 머리맡에 고이 모셔 두었다고. 손 편지가 골동품 취급을 받는 세상에 아내를 위한 편지 쓰기를 기획한 리더의 결이 깊고 섬세하다. 결혼 후에 남편의 편지 한 장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걸 나이 지긋한 아내들은 잘 안다. 어려운 부탁에 기꺼이 응해 준 남편들이 감사하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아내에게 비밀이어야 한다는 수칙을 따르려고 도서관 의자에 앉아 고심했다는 남편에겐 차라리 땀 흘리며 바깥일 하는 게 더 쉬웠을지 모른다. 아내의 품이, 여인의 치마폭이 더 넓고 깊어질 수 있는 건 남편의 그런 마음이 있어서일 테다. 남편의 편지를 별처럼 가슴에 안는 까닭이다.
아내가 꽃이라면 남편은 꽃받침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예쁜 사람이라 해도 긴 세월 부대끼며 사는 동안 어찌 곱기만 했을까. 미숙한 아내를 꽃으로 여기며 꽃이 피도록 감싸고 받쳐준 받침대가 되어준 사람, 여린 꽃잎이 지고 소담스러운 꽃으로 다시 피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터가 되고 뿌리가 되어준 남편이 고맙다. 그의 깊은 인내가 있었기에 아내는 마침내 꽃이 될 수 있었을 게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다’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편지의 여운이 길다.
사람의 향기만큼 아름다운 게 어디 있을까. 먼 길 함께 걷는 이를 꽃보다 귀히 여기며 어깨 기대어 나란히 가는 모습이 꽃보다 향기롭다. 작은 풀꽃 하나로 집안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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