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미 좋은 시-최재준] 판도라 상자

최재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판도라 상자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로 술렁이는 도심

고층 건물 그림자가 덮은 뒷골목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구둣발을 깃발처럼 등에 꽂고

편의점 주차장에 널브러진 흑인 여인

분유 한 통이 그녀를 전쟁포로로 만들어버린 것인가

 

“숨 막혀요, 숨 쉴 수 없어요”

백인 경찰관들이 겨누는 총구 앞에

허벅지와 어깨가 눌린 채 버둥거리고 있다

 

숨 막혀 본 적 없는 사람은 숨 막히는 절규를 알지 못하는 걸까

 

굿캅이 가진 총은 모두 착한 총인가요?

배드캅이 가진 총의 피부는 어떤 색인가요?

묻고 싶다가도

명령을 따르는 군인처럼 모두 뒷걸음질 친다

 

숨통을 열어 줄 마법은 판도라 상자에 갇힌 지 오래

여인이 찾던 열쇠는 허기진 분유통에 숨겨져 있지 않았다

 

모성 옆엔 눈을 껌벅이며 엎질러진 아기

고사리손이 움켜쥔 성조기엔

포성이 남긴 연기처럼 기죽은 바람

 

비둘기를 꺼내줘야 할 마술사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있고

판도라 상자엔 자물쇠 하나

금속성 소리를 내며 덧채워진다

 

인류애와 평등을 목 터지게 외치며

화려한 퍼레이드에 떠내려가는 형형색색의 인종들

 

정작 무색인 햇살만

눈을 부라리며 총구를 막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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