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이지은] 틀에 박힌 시간
- 23-01-02
이지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틀에 박힌 시간
한동안 고요한 저녁이었다. 어느 날부터 냉장고에서 얼음이 만들어져 우두둑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스 메이커가 고장이 났다. 버튼만 누르면 와르르 쏟아지는 얼음 기능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 무척이나 아쉽다. 손쉽게 만들던 아이스커피를 위해 손수 얼음 틀에 물을 부어 얼려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부엌 맨 아래 서랍에서 한동안 잠자던 얼음 틀을 꺼내 사용하기 시작했다. 뭐 하나 고치려면 예상외로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미국이라 불편함도 번거로움도 금세 익숙해졌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하나둘 담다 보니 가끔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형체가 없는 물은 커피잔에 따르면 커피잔 모양의 물이 되고 물통에 담으면 물통 모양이 된다. 사각 틀에는 사각 모양의 얼음이, 동그란 틀에는 동그란 얼음이 만들어진다. 어떤 틀에 갇히느냐에 따라 그대로의 모양으로 굳어 버린다.
없는 것도 많은 무색, 무취, 무미의 물은 무한한 듯 무한하지 않고 무형인 듯 무형이 아니다. 형체는 없지만 실체는 있다. 그 오묘한 물이 얼음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시간을 떠올렸다. 무한(無限)한 물이 유한(有限)의 얼음이 되듯 무한의 시간이 달력이란 틀에 갇힌 것 같다.
경계 없이 흐르고 흩어져버리는 시간을 모아서 누군가가 고이 담아두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생존을 위해 자연 현상과 흐름을 관찰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양의 공전주기와 달의 모양을 바탕으로 일 년을 만들었고 한 달과 하루라는 이름으로 시간이 틀에 갇히게 된 것이다.
무한정으로 주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작정 지나버릴 수 있는 시간에 의미를 더해준 시간의 틀이 고맙게 느껴진다. 걱정 없이 얼음을 쏟아내던 아이스 메이커가 갑작스레 고장이 나버린 것처럼 언제 우리의 시간이 멈춰버릴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틀이 있기에 하루가 끝나는 밤 내일을 꿈꿀 수 있고 한 해가 끝나는 즈음에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감사와 고마움, 그리고 새로운 결심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1분에 60초, 하루는 24시간이지만 흔히들 이야기한다. 시간은 나이와 비례해 가속도가 붙는 것 같다고. 아장아장 걷던 시간이 이젠 성큼성큼 큰 발을 내딛는 듯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하던 시간이 아이스 메이커의 얼음이라면 지금의 나의 시간은 얼음 틀의 얼음처럼 작은 개수에 언제나 내 노력도 곁들여야 한다는 느낌이다.
오늘 아침에도 비어버린 얼음 틀 칸 칸마다 조심스럽게 물을 채운다. 물 표면이 흔들흔들하자 조심조심 균형을 잡는다. 냉동실 문을 열고 마른 멸치와 고춧가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최대한 평평한 곳을 찾아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새로운 얼음 틀에 또 한 번 가지런히 예쁘게 얼린 얼음 12개가 주어졌다. 내게 주어진 소중한 틀에 박힌 시간을 한 개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렇게 새로운 일 년을 맞이해 본다.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2022년 한해가 지나가고 또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올해는 또 얼마나 빠르게 뛰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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