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유세진] 신조어 나들이

유세진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신조어 나들이*


밈? 신문 기사를 읽다가 낯선 단어 하나에 눈길이 갔다. 또 다른 신조어가 유행하나, 궁금증 전구에 불이 켜진다.   

언제부터인가 한글을 읽다가도 국어사전이나 구글 검색을 자꾸 열고 있다. 학창 시절 영어 독해를 할 때처럼 한글을 읽는데 사전이 필요하게 될 줄이야. 모국어가 외국어로 변해 가는 기분이다. 한국에 살고 있다면 사전을 찾으면서까지 일일이 알려고 했을까? 영어가 모국어가 될 수 없다는 건 진작에 인정했지만, 한글이 점점 외국어가 되어가는 신세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서글프다. 그래서 새로운 어휘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으려고 애꿎은 이민살이의 집착을 부린다.

길바닥에서 동전이라도 주운 아이처럼, 요걸 어디다 어떻게 써먹을까 꾸러기 표정을 하고 검색창에 '밈'이라고 쳤다. 처음 보는 용어가 나오면, 일단은 국어사전을 먼저 펼친다. 주운 돈을 써도 되는지 엄마에게 허락받는 절차인 셈이다. 사전에 등재된 단어라면, 신조어든 외래어든 줄임말이든 한두 푼이 아쉬운 나에겐 모두 다 우리말로 적립된다.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문방구로 향하는 꼬마의 마음이랄까. 인터넷 뉴스에서 건진 새 단어로 쌈박한 글 하나와 맞바꿀 수 있지 않을까 설레발을 떨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은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단어 뜻을 알려 준 곳은 국어사전이 아니라 영어사전이다.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인 거다. 게다가 신조어이기는커녕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이미 존재한 단어다. 1976년도에 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사회 문화적 개념으로 사용됐다. 오랫동안 내 책장 한쪽에 버젓이 꽂혀 있던 책이기에 더욱 민망했다. lol이나 OTL처럼 meme은 어떤 인터넷 약자일까 머리를 굴려본 게 계면쩍다. 한글이든 영어든 변화하는 언어를 대하는 나의 자세가 조금은 경박스러웠나 보다.

처음 기대와 사뭇 다른 종류의 단어란 사실이 나의 태도를 바꿨다. 포털 사이트로 옮겨 좀 더 여러모로 ‘밈’의 뜻을 살펴보니, 요즘 유행하는 짤방의 인터넷 용어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인문학적 의미가 깊었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모방과 같은 형태로 복제, 전달하는 매개체의 유형이라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나니, 오래전 유행어 하나가 생각났다. 이렇게 깊은 뜻이!

심심풀이로 시작한 검색이 뜻밖의 교양과 지식으로 인도했다. 글쓰기라는 문화 콘텐츠를 배워가는 요즘, 모방과 창조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더 진지해질 필요를 느끼던 참이다. 모국어에 굶주린 허기를 불량식품으로 채우려 급급했던 나를 다시 가다듬는다. 그리고 수전 블랙모어의 <밈>이란 책을 독서목록에 올린다.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처럼 책장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야겠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주 펼쳐본 그림책이 있다. 피터 H 레이놀즈의 <단어 수집가>에는 낱말을 모으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고많은 것 중에 단어를 수집하는 아이가 특이하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다. 높이 쌓인 말 상자를 옮기다가 그만 미끄러져 낱말종이가 온통 뒤죽박죽된 상황도 꼭 지금의 나 같다. 아이는 단어를 다시 주워 모으다가 생각지도 못한 시를 쓰게 되고 그 시로 노래를 부르고 위로를 건넨다. 그 뒤로 더 열심히 자기 생각과 감정, 꿈을 담은 말을 모은다. 그리고 바람 부는 어느 날 언덕에 올라, 세상으로 모두 날려 보낸다. 더는 말이 필요 없는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는데, 그 화면 속 아이의 행복이 마냥 부럽다. 산들바람 부는 오후를 나는 언제나 맞을 수 있으려나.

딸에게 ‘밈’이란 말 알아? 물었더니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이게 언제 적 말인데 모르냐고 되묻는다. 언어의 바다에 뒤늦게 놀러 나와 신대륙을 발견한 나의 희열이 요즘 애들에겐 오글거리나 보다. 그래 난 몰랐다. 아니 이제 알았다. 속으로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오늘의 나들이가 재미있었던 것만큼은 순순히 인정해야겠다.

*1997년부터 현재까지 MBC에서 방영 중인 <우리말 나들이>를 밈(meme)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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