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과 함께 하는 서북미 좋은 시-심혜숙] 바위의 수염

심혜숙(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바위의 수염


바람 부는 날 두꺼운 재킷을 입었습니다

얇은 주머니 속 작년에 넣어둔 작은 상자

기다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상자 속에 체온을 저장합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남긴

빗금 닮은 마음을 넣고

밤의 깊이 찾아 길을 나섭니다

깊어지기 위해서 주머니도 비워 둡니다

어둠의 깊이는 오랜 연인처럼

익숙함이 낯설어집니다


벼랑 끝

바위의 수염처럼 매달린 야생화

어제를 생각하며 뿌리 내리는 연습을 합니다

절벽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붉은 혀를 내밀고

하얀 솜털이 바람을 움켜쥡니다

돌에 묻혀 보이지 않는 노란 꽃 한송이

구르는 돌멩이의 옷이 되어 줍니다


추락하는 만큼 깊어지는 마음

나만의 상자 속에 넣어두고

혀를 닮은 꽃같은 꿈을 꿉니다


언덕에 

물감 묻은 붓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해설>

좋은 시는 참신한 이미지와 깊은 시적 주제의식이 함께 구축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서 시인은 바위위에 핀 야생화를 “바위의 수염”의 이미지로 돌에 핀 노란꽃 한송이를 “돌멩이의 옷” 이미지로, 그리고 “혀를 닮은 꽃”과 “물감 묻은 붓”을 시의 상징으로 형상화한다. 

다음으로 시인은 자기 가슴 속 주머니에 작은 상자를 품어 사랑의 체온을 담고 기다람과 비움과 인내를 통하여“추락하는 만큼 깊어지는 마음”의 시를 창조하는 강한 시정신을 시적 주제의식으로 표현한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절벽과 벼랑 끝의 상황 속에서 피는 꽃처럼 고난과 싸우는 투혼으로 시를 창조하겠다는 강한 시 정신이 신선한 이미지들로 축조된 예술이란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김영호 시인(숭실대 명예교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