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왠지, 웬즈데이
- 24-05-13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왠지, 웬즈데이
형님, 내일은 우리 어디 가요?
질문을 던지는 건 항상 그녀의 몫이다.
매주 수요일만 기다린다는 말에 적잖은 책임감이 밀려온다. SNS와 블로그를 뒤지며 그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는다. 시애틀 지역에 산 지 20년이 넘었지만, 발걸음 딛는 곳이 항상 거기서 거기라 쉽지 않다. 새로운 곳을 찾지 않더라도 늘 다니던 동네에서조차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수없이 많다는 걸 깨닫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써 2년째다. 어느 날, 동생이 푹 꺼진 목소리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육아로 지친 올케를 남편으로서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신이 쉬는 날 아이를 볼 테니 둘이 어디든 바람 쐬러 나가는 게 어떠냐고. 사실, 동생의 제안은 비단 올케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큰딸을 동부로 보내고 빈둥지 증후군으로 힘들었던 내게도 힐링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작된 수요 나들이. 이제 막 시애틀살이에 적응 중인 올케 대신 내가 장소를 찾기로 했다. 그래, 나들이의 꽃은 식도락이지. 그렇게 온 동네 레스토랑 뒤지기는 거의 일상이 됐다. 처음엔 전에 갔던 데 중 기억에 남는 곳, 인테리어가 멋졌던 곳, 주변 경치가 좋은 곳 위주로 선택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정보력은 금방 바닥났다. 그다음엔 새로운 장소들을 찾느라 부지런히 인터넷을 뒤졌다. 세상엔 우리가 다 먹고 죽지 못할 만큼 많은 음식이 존재한다. 그러니 나라와 재료를 나누고, 전통과 퓨전을 나누면 매번 다른 맛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커피에 디저트 가게까지 다 합치면 그 수는 몇 배로 늘어난다. 뿐인가. 지금도 매주 새로운 가게들이 그랜드 오프닝 사인을 붙이며 우리의 식욕에 초대장을 던진다.
아직 이 지역을 잘 모르는 올케는 어딜 가나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셀카 찍기에 바빴다. 나중에 그것들은 종종 가족 채팅방에 올라오곤 했다. 형님, 여기 너무 좋아요. 형님, 여기 음식 너무 맛있고 예뻐요. 고작 반나절 나들이지만 올케의 사진첩엔 온갖 음식, 풍경 사진이 쌓여갔다.
커클랜드 호숫가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본토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의 독특한 악센트가 마치 우리를 이탈리아 어느 해안가에 데려다 놓은 듯했다. 평소 못 먹어보던 메뉴에 도전해 보다가 의외로 훌륭한 요리를 만나기도 했던 곳이다. 올케가 커클랜드 호숫가를 마음에 들어 해서 한 번 더 갔었는데 그때는 호숫가 길을 쭉 걷다가 길 끝에서 이제 막 오픈한 한국 치킨집을 만나기도 했다.
스노호미시에선 멕시코 요리를 먹은 후 건너편에 있는 앤틱샵에 갔다. 그곳은 마치 역사박물관 같아서 한국인인 우리의 눈에 신기한 것들이 많았는데 특별히 일제 강점기 때 아시아를 여행한 누군가의 항해 지도를 발견하기도 했다. 서울의 지명이 경성이라고 되어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지도에 적혀 있는 날짜가 광복 한 달 전이라는 걸 알게 되고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한가로이 크루즈 여행을 즐기며 작은 나라의 역사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겠지만. 그렇게 입맛이 씁쓸해지면 달콤한 걸 찾아야 한다. 다행히 그런 동네엔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비법을 자랑하는 파이 가게가 있다. 주인 여자의 입담에 너무 많은 파이 조각을 입속에 집어넣게 되니 주의할 것.
근래엔 벨뷰에 유명한 갈비찜 식당과 중국집이 개업했다고 해서 오픈런을 한 적이 있다. 큰애를 통해 들었던, 샌프란시스코에 본점을 둔 갈비찜 전문 식당은 육개장 칼국수가 더 매력적이었다. 한국 유명 쉐프가 운영한다는 중국집은 딱 한국에서 배달시켜 먹던 그 맛을 떠올리게 해 짬뽕, 탕수육, 쟁반짜장을 무려 30분 만에 흡입하게 만들었다. 그날 동석했던 친구는 사람들이 음식 하나 먹겠다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달려와 줄 서는 게 놀랍다고 했다.
밥을 먹고 난 후엔 주변 공원을 걸으며 그동안 못했던 벚꽃놀이, 단풍놀이도 하고, 처음 보는 상점에 무작정 들어가 예쁜 쓰레기(?)들을 사 오기도 했다. 또한, 새로운 지역을 돌아다니며 동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다 보니 이제 점점 갈 곳이 줄어든다. 안 그래도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돌아오느라 언제나 신데렐라처럼 시간에 쫓기는데. 심지어 갈 수 있는 지역도 반경 40분을 넘지 못하니 가끔 우린 그 한계성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형님, 우리 애들 좀 크면 우리 둘이 LA로 식도락 여행 가요. 형님, 저 형님이랑 둘이 한국 가서 롯데월드 가고 싶어요.
10살 차이 나는 올케가 수요 나들이의 반경을 상상과 기대 속에서 넓혀 간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핀을 꽂고 빙글 한 바퀴 돌린 컴퍼스처럼 그 한계 안에서 누리는 이 시간도 충분히 즐겁고 감사하다.
형님, 여기 애들이랑 다시 와야겠어요. 형님, 갈 때 애들 먹게 음식 좀 사 가야겠어요.
별수 없는 엄마의 습관. 좋은 곳 가면 생각나는 사람, 맛있는 음식 먹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라던데. 육아 스트레스 풀려고 나와도 애들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 그들을 향한 짝사랑으로 핑계 댄다.
수요 나들이가 좀 변질된 것 같아. 힐링하려고 시작했는데 요즘은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재밌게 놀려고 나오는 것 같아.
내 말에 상관없다는 듯 올케가 어깨를 으쓱한다. 수요일을 기다리는 힘으로 산다던 올케의 얼굴이 이젠 월화수목금토일 모두 수요일 같다.
내일은 수요일이다. 오늘도 그녀는 내게 묻는다.
형님, 내일은 우리 어디 가요?
글쎄.
왠지 기다려지는 웬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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