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참상 세상에 알린 AP통신 앤더슨 기자 별세

종군 기자로 시작해 AP통신 입사…도쿄지국 파견 시절 광주 취재

헤즈볼라에 6년 넘게 인질 잡혀…"그 누구도 내 존엄 뺏을 수 없어"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직접 취재해 세상에 알린 테리 앤더슨 전 AP통신 기자가 21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뉴욕타임스(NYT)는 그가 최근 심장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앤더슨이 방문한 현장 중 상당수는 군이 주둔하거나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커리어의 시작도 군과 함께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해병대에 들어가 5년간 일본 오키나와·베트남 등에서 종군 기자로 복무했다.

제대 후에는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과 정치학 학위를 따고 AP통신의 기자로서 디트로이트·루이빌·뉴욕·도쿄·요하네스버그·베이루트 등의 현장을 누볐다. 5·18 취재 기사는 그가 도쿄지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쓴 것이다.

그는 시아파 무장 단체 헤즈볼라에 1985년 납치됐다가 7년 만에 풀려난 인질로도 유명한데, 당시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무슬림과 드루즈족을 공격하며 미국산 무기를 사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

 

앤더슨은 2454일 동안 헤즈볼라 은신처 20여 곳에 끌려다니며 구타를 당하거나 사슬에 묶이는 고초를 당했다. 1년 정도 독방에 갇혀 지내기도 했는데, 동료 인질들과 감방 사이의 벽을 두드리는 방식으로 소통했다.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의지할 것 하나 없고 내 마음을 붙잡을 방법도 없었다"며 "그 누구도 내 자존심과 존엄성을 빼앗을 수 없으며 오직 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유일한 방어책"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 AP통신사에서 인질 생활 끝에 생환한 테리 앤더슨 기자가 손을 흔들며 동료들에게 화답하고 있다. 오른편 기둥 벽에는 '억류된 테리를 석방하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1991.12.10/ © AFP=뉴스1 © News1 권진영 기자
미국 뉴욕 AP통신사에서 인질 생활 끝에 생환한 테리 앤더슨 기자가 손을 흔들며 동료들에게 화답하고 있다. 오른편 기둥 벽에는 '억류된 테리를 석방하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1991.12.10


앤더슨은 1991년 석방된 후 은퇴할 때까지 뉴욕 컬럼비아·오하이오·켄터키·플로리다 대학교 등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다. 이 밖에도 오하이오주 아테네에서 블루스 바를 운영하는가 하면, 2004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오하이오주 상원 의원으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그는 자신을 납치한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연방법원에 1억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이란의 자산에서 추징한 2600만 달러(약 360억 원)를 지급받았지만 7년 후 파산하고 만다.

6살에야 처음 아버지 앤더슨을 만난 술로메는 "아버지의 삶은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극심한 고통으로 점철됐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조용하고 편안한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다.

앤더슨은 말년에 친구와 함께 베트남 아동 기금이라는 재단을 설립해 현지에 50개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언론인보호위원회 명예위원장으로서도 활동했다.

술로메는 "나는 아버지가 자신이 겪은 최악의 경험이 아니라 베트남 아동 기금, 언론인 보호위원회, 노숙자 퇴역군인 및 여러 놀라운 대의를 위한 인도주의적 활동을 통해 기억되길 원하셨으리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앤더슨은 떠났지만 그가 쓴 기사는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있다. 한국에서도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데, 전남도청에는 그가 1980년 5월 22~27일 광주 현장에서 송고한 기사 등이 전시돼 있다. 당시 계엄령으로 한국 내에서 언론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과 달리, 당시 광주의 상황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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