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윤선] 똑똑하지 않기
- 24-02-19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똑똑하지 않기
여고 동기회 방, 톡톡 튀는 재치와 위로의 말들이 따습다.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말도 있고 어쩜 저리도 살갑게 표현할까 싶은 말도 있다. 익살 섞인 사투리에서는 독특한 정감이 배어 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는 걸 느낀다.
별주부전에 나오는 토끼의 재치는 언제 들어도 그 영특함에 웃음이 돈다. 용왕이시여, 제 간의 효험을 알아 구하려는 이들이 많아서 저는 그것을 함부로 갖고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하도 화창해서 간을 양지바른 너럭바위에 널어놓고 왔는데 용왕님께서 위중하시다는 말을 진작 듣지 못한 터, 지금 당장 육지에 나가서 그것을 걷어오겠나이다, 라고 했다나.
반면, 말실수로 체면을 구긴 정치인이 있다. 60, 70대는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망언에 정치 판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콕 집어 지목된 사람들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학자들 말로는 말실수라는 게 무의식에 살아 있는 말이 무심코 튀어나온 것이어서 말한 이의 의도와 영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실수한 말에도 책임을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선거를 앞두고 말의 홍수를 이루는 요즘, 그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온다.
살다 보면 가끔 서로 의견 대립이 생길 때가 있다. 양측 주장이 거셀수록 편이 갈라지고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그럴 때 뜬금없이 끼어드는 게 있다. 상대를 험담하는 말과 이간질하는 말, 말이 불길을 지피는 기름이다. 그래서인지 불교에서는 경을 읽을 때 입으로 지은 죄를 씻는 진언부터 외운다. 거짓말, 아첨하는 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등이 다 입놀림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낭패를 당하게도 하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묵언이 눈길을 끈다. 묵언 수행은 관심을 오로지 자기에게 집중하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공부라고 한다. 말은 밖으로 치닫는 연습이며 묵언은 안으로 치닫는 공부다. 말할 때는 관심이 밖으로 향하게 돼서 제 마음 살피기가 쉽지 않다. 진실한 기도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원초적인 침묵으로 이루어진다고 한 법정 스님의 말도 같은 의미일 테다. 그래서인지 말 많은 사람을 보면 진실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다.
시집의 분위기와 친정의 분위기는 참 달랐다. 시누이들의 대화는 정스럽고 애정 표현에도 스스럼이 없어서 낯설고 어려운 마음에 곧잘 위로됐다. 반면, 친정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칭찬에도 인색했지만, 꾸중이나 간섭도 아꼈다. 어떤 땐 잘못을 알고서도 내색하지 않으니 되레 우리가 더 긴장했다. 어쩜 그건 정반합의 과정처럼 스스로 절충점을 찾아갈 것이라는 자식들에 대한 믿음과 존중 아니었을까. 정말이지 한 번씩 듣는 아버지의 훈육에 우리는 눈물을 쏙 빼곤 했다.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말들을 많이 했을까. 격려보다는 힐책을, 실망스러운 말로 한순간에 상대를 등 돌리게 하지는 않았을까. 위로랍시고 한 말이 상처에 소금 뿌리듯 상대의 아픔을 더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있다면 적어도 강직함을 덧입힌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내 주장만은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나이 40을 넘어서도 시비 가리는 일에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좋아할 일이 아니다. 덕德이 없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나잇값 하기가 쉽지 않다. 똑똑하지 않기가 똑똑하기보다 힘든 세상이다.
요즘 들어 친구들의 말에 자주 동감한다. 그건 함께 세상을 살아오면서 겪은 동질의 세대의식과 행간의 뜻을 먼저 이해하려는 단단한 우정을 보는 까닭이다. 어쩜 그 밑바닥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은, 더는 똑똑할 필요가 없다는 삶의 순리를 깨달은 게 아닐까.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부추기는 친구들의 말에서 해묵은 술내가 난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서북미 좋은 시-이춘혜] 나그네 길에 길동무
- 샘 심 시애틀한인회 부회장도 워싱턴주 하원 출마한다
- 시애틀 영사관, 중소벤처기업 지원협의체 개최
- 한인2세들이 시애틀 영자신문 인수했다
- 미국프로축구 열린 시애틀 축구장서도 "Korea"
- 코리아나이트 행사 전‘코리안 푸드트럭’운영
- 시애틀영사관 청사 경비 및 청소용역 입찰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25일 토요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대한산악회 25일 토요산행
- 워싱턴주 태권도와 체육계 대부 윤학덕 관장 추모식 열려
- “워싱턴주 정부납품 원하는 한인분들 오세요”
- 시애틀통합한국학교 온라인 교사연수 실시
- “한인여러분, 부동산 매매 및 투자 정보를 알려드립니다”
- 한인 비즈니스를 위한 안전세미나 성황리에 열려
- 시애틀영사관 전문직 행정직원 채용한다
- 구순 앞둔 성옥순시인 두번째 시집냈다
- 워싱턴주 음악협회 정기연주회 매진임박 “20% 할인 혜택도”
- 시애틀오페라 '한국인의 날'행사 성황리에 열려(+영상,화보)
- 귀여운 시애틀통합 한국학교 유치부 졸업식 개최(+영상,화보)
- 벨뷰통합 한국학교 신나는 장날행사 성황리에 열려(+화보)
- 박용국ㆍ케이 전ㆍ리디아 리 “상공회의소 징계는 원천무효”
시애틀 뉴스
- 한국 유명베이커리 파리바게뜨, 린우드점 드디어 내일 오픈한다
- 이런 사람이 시의원이었다니…50대 전 바슬시의원, 20살 여자친구 살해
- 시애틀 여름축제 서막 '프리몬트 페어' 다음 달에
- “아번경찰관 총격은 정당방위 아니다”
- 시애틀에 처음으로 네덜란드식 자전거교차로 들어서
- 세인트 헬렌스 일부 등산로 평일 폐쇄한다
- 프레메라 가입자, 멀티케어 소속 병원서 치료 가능하다
- 워싱턴주 산양이 줄어드는 원인은?
- 보잉 유인우주선 '스타라이너', 6월 다시 시도한다
- 워싱턴주 장기요양 보험은 미 전국적 '시금석'이다
- 워싱턴주 펜타닐 마약해독제 무료로 우송해준다
- 시애틀 경찰국장은 '동네북'인가?
- 스포캔시의회 “유리창에 에어컨 설치 못하게 하면 불법”
뉴스포커스
- 원전 오염수 방류 후 9개월…'수산물 안전관리' 어떻게 이뤄지나
- '고령화' 한국 미래 실질금리 내려간다…"수명 늘면 금리↓"
- 홍준표, 이강인 이어 김호중 인성 비판…"가수 이전에 인간이 돼라"
- 北, 서해 남쪽으로 미상 발사체 발사…日 "탄도미사일 추정"
- 한중일 협력 물꼬 텄지만…'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문에 못 넣었다
- "지분 요구 아냐" 한일 정상 선긋기…'라인사태' 장기화 불가피
- 檢 "배모 씨, '김혜경' 음식 배달해 받은 돈으로 재산 불렸나"
- 조국혁신당 "1호 법안은 한동훈 특검법…30일 개원 즉시 발의"
- "'부산 돌려차기' 가해자, 피해자 죽이려 탈옥 계획 세웠다" 동료 수감자 진술
- 민희진 "뉴진스, 1조 넘게 불러야"…어도어 부대표와 대화 공개
- 전세사기 주택 '감정가-낙찰가' 차익, 임차인에 돌려준다
- 전북대 학칙개정 사실상 마무리…의대교수들 “학생 돌아올 길 막혔다”
- 우주청 개청…윤영빈 청장 "우주 경제 강국 디딤돌 될 것"
- 강형욱이 쏘아올린 '안락사'…"죄책감은 그만, 주변 차가운 시선 극복을"
- "뺑소니 추모길이냐"…김천시 '김호중 소리길 철거' 빗발쳐 고민
- 中과 '소통 복원' 한일 '역사적 도약'…尹, 동북아 외교 드라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