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전병두] 작은 마감

전병두(서북미문인협회 회원)

 

작은 마감

 

십이월도 중순이 지나고 있다. 곧 성탄절이 찾아오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다. 적절한 단어가 무엇일까? 마감이라는 말로 긴 한 해를 맺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은가 보다. 이두에서는 마감(磨勘)이라고 적었다고 하는 데 이 말은 중국 송나라에서 관리의 성적을 매길 때 사용하던 표현이라고 한다.

마감은 시간적으로 본다면 정해진 어떤 시간의 끝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년의 마감은 십이월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지난 한 해를 뒤돌아 보면서 한 해를 결산하는 일은 한 해를 마감하는 일이 될 것이다. 몇 일 남지 않은 일년을 마감하는 마음이 숙연하게 다가온다. 한 해를 보내면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해마다 이맘 때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회한이라는 단어이다. 후회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금쪽같이 소중한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했나를 되돌아 본다. 시간의 가치에 걸맞게 사용하지 못한 때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알차게 사용할 수 있던 날을 무료하게 허송했다면 얼마나 큰 손실일까... 잘 사용한 날과 낭비한 날을 비교한다면 허송한 날, 시간이 더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회한속에는 작은 마감의 보람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쉬지 않고 내리고 있다. 우기에 접어드는 이곳 날씨라 이상할 것은 없다. 비가 내리지만 마음은 즐겁다. 지난해 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면 마음에도 비가 내리곤 했었다. 왜냐하면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는 집의 낡은 지붕 곳곳에서 물이 새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벽은 흘러내린 빗 물로 얼룩지고 바닥은 물로 흠뻑 젖곤했었다. 손님이라도 찾아오게 되면 부끄러워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도 없었다. 새는 지붕을 고치기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대기도 겁이 났다. 전문 업체에 맡기려고 알아보니 이만불 정도는 잡아야 했다. 갑자기 그 큰 돈을 마련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고심 끝에 직접 재료를 사서 고치기로 했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인 여름이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여름철 날씨는 가을과는 딴 판이다. 이곳의 칠 팔월의 날씨는 화창 그 자체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장마도 없는 계절이다. 여름 두 달 동안 지붕을 고치기로 했다. 그대로 두면 우기가 시작되는 가을부터 또 다시 방안과 부엌에는 물이 샐 것이다. 얼룩진 안방 벽에는 또 다시 얼룩이 지고 부엌 구석에는 물을 받는 양동이를 늘 받쳐두어야 할 것이다. 더운 날이지만 수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붕으로 올라갔던 첫 날도 햇빛은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구름은 멀리 떠났고 온 몸으로 그 열을 받아야만 했다. 슬레이트 지붕을 한 장 한 장 뜯어내었다. 지붕은 오래되어 많이 상해 있었다. 속 앓이 하듯이 특히 안쪽은 너덜 너덜했다. 건축재료상에 가서 사 온 판자로 교체했다. 받침대를 따라 정교하게 잘라 판자를 대고 단단하게 못질을 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일의 진행은 느려 터졌다. 하지만 고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일은 네 주간이나 걸렸다. 물이 샌 곳을 일일이 점검하고 그 부분의 슬레이트를 걷어내고 판자를 교체했다. 다섯 시쯤 되면 몸은 흠뻑 젖었다. 마음은 지쳐 지붕위에라도 덜렁 눕고 싶었다. 하루를 마감하고 지붕에서 내려오는 그 시간은 가장 즐거웠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금방 잠에 빠져들곤 했다. 두 달이 금방 지났다. 물이 새던 지붕은 새 판자와 슬레이트로 모두 교체되었다. 

공사가 끝내자 여름도 물러갔다. 가을과 함께 우기가 찾아오고 흐린 날씨가 자주왔다.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비가 오면 마음을 졸이곤 했지만 금년은 달랐다. 오히려 비가 기다려 졌다. 시월에 접어들자 제법 빗 방울도 굵어지고 어떤 날은 주룩 주룩 내리기도 했다. 그 때마다 천정을 자세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벽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다. 습기라도 배어 나오나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빗 물은 스며들지 않았다. 지붕 수리는 성공적이었다. 

어느 날 한국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곳으로 일년간 방문학자로 오게 된 한 가족으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십이월에 유진에 도착하는 데 집을 찾을 동안 임시로 거처할 숙소를 찾는 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답신을 보냈다. “집이 소박하기는 하지만 편히 쉴 수 있는 곳입니다. 환영합니다. 온 가족이 오셔서 집을 구할 동안 편하게 지나세요. 사용은 무료입니다” 

박 교수님은 예정대로 유진공항에 도착했고 게스트하우스로 무사히 입주했다. 12월 15일이었다. 그날따라 겨울비는 내리고 있었다. 빗 속의 게스트하우스는 포근했다. 작은 마감이었지만 보람은 그 보다 훨씬 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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