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윤선] 빅 트리(Big Tree)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빅 트리(Big Tree)


고개를 한참이나 뒤로 젖혀서야 나무의 꼭대기가 보였다. 어림잡아 나이가 1500살이라는데 땅을 딛고 서 있는 장딴지가 여전히 탄탄했다. 286피트의 키와 74.5피트의 허리둘레를 가진 이 나무의 이름은 Big Tree, 레드우드 숲에서 산다. 인증샷을 하느라 발뒤꿈치를 들고 허리를 곧추세웠는데 나무에 비하니 손가락 한 마디에도 미치지 않았다. 

겉껍질 같은 건 부질없는 것이라며 훌훌 벗어버린 맨살에 드러난 굵은 주름이 작은 도랑을 이루었다. 묵은 옹이가 움푹움푹 패인 건 삶의 연륜이리라. 휘어진 곳 없이 쭉 뻗은 둥치가 어찌나 우람한지 과연 숲을 대표할 만했다. 빅 트리만큼 키 큰 나무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출중한 외모가 한몫하는 건 어느 세상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멀리서 가까이서 사진 몇 장을 찍어봐도 나무를 온전히 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냥 눈에 담기로 했다. 찬찬히 더듬으니 아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더부살이 나뭇가지였다. 처음엔 옆에 있던 나뭇가지가 빅 트리에 팔을 걸쳐 놓았나 했다. 아니었다. 둥치에 웬 나무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제 이파리와 다른 게 적어도 두세 종류는 되는 듯했다. 

옆으로 트레일 코스가 이어졌다. 키 큰 나무의 숲(Tall Tree Grove)이었다.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있었으며 죽은 나무에서 생명을 키운 것도 있었다. 나무 밑둥치가 동굴처럼 뻥 뚫린 것도 있고, 뿌리가 서로 닿아 한 몸이 된 것도 있었으며, 불에 탄 듯 속이 시커먼 흉터를 지닌 것도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자랐건만 모양새가 제각각이었다. 한 뱃속에서 태어나도 아롱이다롱이라더니 그렇다. 숲이 형성된 지 1500여 년, 그곳엔 마치 고대가 숨 쉬는 듯했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숲의 속살을 밟는 듯 폭신폭신했다. 피톤치트 때문인지 기분이 상쾌해졌다. 장난기가 돌았다. 속이 뻥 뚫린 나무의 빈 둥치에 들어가 원시인의 흉내를 내고 곰이 되어 겨울잠 자는 시늉을 했다. 아,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트레일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빅 트리 앞에 섰다. 나무는 왜 저렇게 키를 키웠을까. 그리고 제 혈육도 아닌 걸 왜 품었을까. ‘잭과 콩나무’ 동화가 생각났다. 마법의 콩을 심은 잭이 콩나무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던 것처럼 빅 트리도 그러고 싶었을까. 갈매기 조나단처럼 먼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었을까. 눈 아래 내려다뵈는 숲에서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의 팔에 다른 수종의 씨를 안은 건 사랑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무엇보다 그의 기나긴 삶은 축복이었을까, 형벌이었을까. 

아흔을 넘긴 어머니는 매일 밤 죽음을 기다린다. 이제 삶에 무슨 미련이 있겠냐고 하신다. 아버지 생전에 버릇처럼 다음 생에선 절대 만나지 말자고 으름장을 놓더니 이제는 먼저 떠난 아버지가 왜 당신을 데리러 오지 않느냐고 성화다. 어릴 때 동무들도 저승에서 저들끼리 노느라 당신을 잊은 모양이라며 못내 서운해한다. 부지런히 걷던 아침 산책도 이즈음 그만뒀다. 어떤 말도 어머니의 삶에 의욕을 불어넣지 못한다. 어머니의 기력이 나날이 쇠잔하다. 

얼마 전 모임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죽을 즈음엔 수명이 120세란다. 재수 없으면 150세까지 살 수도 있고. 그 말에 동감했다. 장수長壽가 재수 없음이 되어버린 인간 세상, 나무의 1500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나무의 올곧은 자세가 마치 명상에 든 모습 같아서 다른 수종의 나무를 품은 게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어쩜 장수한다는 건 이미 무념무상의 경지일까, 아니면 무장무애한 성품 탓일까. 너나없는 이파리들이 제 어미 품에 안긴 양 편안해 보인다.

남편이 빅 트리 전신사진을 보여준다. 하늘에 닿은 듯한 나무꼭대기에서 이파리들이 이마를 맞닿은 채 반짝인다. 굵은 허리둘레만큼이나 나무의 넓은 품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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