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회백] 세월호 침몰사건 9주년을 기해

이회백 의사(머서 아일랜드 거주)

 

세월호 침몰사건 9주년을 기해 


T.S. 엘리어잇이 말했듯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우리에겐 제주 4ㆍ3 사건이 4월에 일어났다. 세월호 사건도 4월(16일)에 일어났다. 4ㆍ19가 4월에 일어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우연히 미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Battle of Lexington 도 4월19일 일어났다. 링컨대통령이 암살당한 날도 4월 14일이다. 

그런데 미국 역사상 최대의 선박 조난사건인 설타나(SULTANA) 침몰도 4월(27일)에 일어났다. 1865년 4월 27일 2,40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미시시피강 상류로 항해하던 설타나호가 새벽 2시 테네시주 멤피스 상류 7마일 되는 지점에서 보일러가 폭발, 불이 나면서 떠내려 가다 7시간후 가라앉아 1,800여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12년 4월 15일 일어난 타이타닉호의 희생숫자 1,517명을 능가하는 대사건이었는데도 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미국인들조차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2%도 되지 않는다. 이유는 4년이란 긴 세월을 전쟁에 시달린 국민들이 더 이상 인명희생 소식을 듣고 싶지 않은 심리와 이때 대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연유로 이 사건은 국민의 시선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큰 사건이란 첫째 4월 9일 남부군 로버트 리 장군이 북부군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남북전쟁이 사실상 끝났다는 소식이다.

둘째 닷새후인 4월 14일 전쟁 시발점이 된 섬터 요새(Ft. Sumter)에 반란군 국기가 내려지고 연방 성조기가 다시 올라가 전국(최소한 북 연방측)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날 저녁 링컨 대통령이 연극을 관람하던 중 암살범의 총에 맞아 다음날 새벽에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다.

셋째 11일 후인 4월 26일 남부군 조세프 존스턴 장군이 북부군 윌리엄 셔먼 장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과 함께 대통령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가 연방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소식이다.

이같은 대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그 다음날 발생한 설타나 폭발사건은 크게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타이타닉 희생자 대부분이 부유한 상류사회 계급이었던 반면 설타나 희생자가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무명의 전쟁포로들이 대부분이었 다는 것도 이 사건이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한 원인이었다. 이 사실은 이 사건의 또 하나의 비극적인 면이다.

설타나의 폭발 주요 원인은 과도하게 많은 승객을 실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주로 선장과 승선책임을 맡았던 병참장 벤튼 해치에게 있었다. 벤튼 해치는 무능하고 부정직한자임에도 이러한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것은 그의 형 오지아수 해치가 링컨과 두터운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은 링컨의 당선에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이다.

 ‘정직한 링컨’으로 불리는 링컨이 정치적 도움을 준 사람에게 정치적 부채를 갚지 않았다면 욕을 먹을 일이어서 그리한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그의 호의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같은 비극적 사고를 보기 전에 링컨은 죽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국민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9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사건을 그만 욹어 먹으라는 측과 진상규명을 외치는 측으로 갈라져 있다. 설타나의 희생자 대부분이 가난한 전쟁 포로 였듯 세월호 희생자의 대부분이 혹시 부의 축척을 무리하게 욕심낸 선주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집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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