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선을 긋다
- 23-04-03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선을 긋다
딸 아이가 내 앞에 굵은 선 하나를 그었다. 지금껏 보지 못한 낯선 선이었다. 그래서 난 그 선을 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예전 같으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단숨에 넘었을 만한 거리였지만, 그 굵은 선 하나 그었다고 두 발은 땅에 깊숙이 붙박였다. 아니, 딸과의 거리가 세 걸음은 더 뒤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선에도 살아있는 선과 죽은 선이 있어요.
언젠가 가까운 디자이너에게서 들었던 그 말이 아주 가느다란 선을 그으며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 내가 놀랄까 봐 아주 조심히 노크했다. 갑자기 세상이 온통 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 모서리부터 시작해 90도로 정확히 꺾이는 반듯한 직선, 볼펜의 겉면을 따라 둥글게 말아 올라가는 곡선. 간혹 어떤 선들은 구겨진 봉투를 따라 제멋대로 꺾이기도 하고, 어느 점에서 만났다가 멀어지기도 했다.
정말 그랬다. 누군가 대충 그은 선에서도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니 놀라웠다. 굵기에서 느껴지는 힘, 방향성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높낮이, 길이에서 느껴지는 호흡까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갖고 그은 선들이었다.
내겐 오지 않을 줄 알았었나 보다. 다른 부모들이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겪는 빈둥지 증후군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던 나였다. 세 명의 아이를 키우다 보니, 얼른 독립해 나가주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기숙사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오는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 달간 아이의 방문을 열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 허전한 마음에 눈물이 절로 나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그 부모의 미성숙을 탓했다. 때가 되면 부모 품을 떠나야 하는 게 순리인 것을 유난을 떤다, 건방진 생각을 했다.
건방을 떤 대가는 혹독했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지나친 간섭을 말아 달라는 딸의 말에 갑자기 가슴이 무거운 추를 단 듯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그 무게에 물속 깊이 가라앉는 마음을 끌어올릴 힘이 없었다. 그건 점점 더 물을 먹어 무게를 더해갔다. 차오르는 눈물에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내 인생이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 그냥 돌아가세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렇게 말했다. 미국에 날 두고 가야 하는 엄마는 걱정이 앞서 내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는데 난 그 손을 뿌리치고 그렇게 말했다. 화를 내듯 언성을 높이며 펑펑 울었다. 그때 엄마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삼켰다. 그땐 그 말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인제 와서야 그 말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엄만 그냥 네가 걱정되어서…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엄마가 내게 하지 못한 말이었단 걸 이십 년이나 지나서 깨닫게 되다니. 무게를 더한 그 말이 바닥에 뭉텅이로 떨어져 굵은 선을 그었다. 선은 거칠고 매끄럽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안에 품은 내용을 숨기기 위해 더 검게 선을 뭉개버렸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딸이 그렇게 내 앞에 선을 긋는데 너무 얄밉고 서운했다고. 엄마는 답했다. 너도 그랬어. 그게 인생이고 순리지. 받아들여.
그 후로 한 달이 넘도록 엄마에게 화상통화를 하지 못했다. 얼굴을 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였다. 가끔 넘어오는 엄마의 문자에 전보다는 조금 더 따뜻해진 답장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화상통화를 하지 않고 줄곧 문자만 보내왔다. 그 문자의 끝에서 엄마는 말했다. 그냥 늘 곁에 있는 것처럼 자주 연락하라고, 언제든 엄마에게 오는 건 환영이니 아이들 다 키우고 와서 같이 시간 보내자고.
엄마에게로 나 있던 죽은 선이 생명을 얻는 순간이었다. 내 앞에 와서 노크하던 아주 가느다란 선이 힘을 갖고 점점 굵어져 갔다. 그리고 그 선은 언제나 내 쪽을 향해 있었단 걸 알았다. 올곧게 긴 시간 늘 그 자리에서, 비록 아주 가늘게나마 끊어지지 않고 내게 붙어 있었단 걸 인제야 알았다.
딸에게서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문자가 왔다. 안경을 새로 맞출까 묻는 일상 대화였다. 나도 늘 그랬던 것처럼 안경 주문해 둘 테니 방학 때 와서 가져가라고 답했다. 문자 속 딸의 말투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자기가 이렇게 엄마와 떨어져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건 다 엄마가 딸을 독립적으로 잘 키웠기 때문이라고, 사랑한다고 딸이 말했다.
자녀가 독립해 나가면 자녀가 부모를 떠나는 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떠나는 연습을 하는 거랍니다.
그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간다. 그동안 굵게 연결되었던 아이와 나의 선이 마치 죽은 선처럼 가늘어졌지만, 또다시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할지도 모르지만, 그 생명력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분 전환을 위해 티(Tea) 샵에 들렀다. 라벤더와 카밀러를 섞은 티와 복숭아가 들어간 달콤한 티를 사고 돌아서는데 아주 예쁜 텀블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랫부분에 다양한 색의 작은 돌멩이가 들어있는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저 아래에 있는 돌멩이들의 의미가 뭔지 아세요? 균형(Balance)이랍니다.
직원의 말에 텀블러를 계산대 위에 함께 올렸다. 줄타기를 잘 하려면 역시 균형이 필요한 법이니까. 딸과 이어진 선을 붙들고 적절한 줄타기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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