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하늘 가는 밝은 길(1)
- 21-03-15
김 준 장로(종교 칼럼니스트)
하늘 가는 밝은 길(1)
-이 글은 1968년 한국에서 발생한 ‘안동 수류탄 투척 사건’의 범인인 이 중사의 최후를, 그를 담당했던 군목과 군의관을 통하여 알려진 내용을 토대로 구성한 실화입니다-
이 중사. 그는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 경상북도 어느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가 성년이 되어 고아원에서 나오게 되자 갈 곳은 오직 군에 입대하는 길 뿐이었다. 입대한 후 그는 장기 복무를 자원하여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였고 곧이어 중사로 진급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언제나 인생의 어두운 그늘이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장병들에게 그렇게 많이 배달되는 편지를 그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고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었다. 다른 장병들은 모두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즐겁게 다녀오는데, 그는 찾아갈 사람도 없었고 그를 품어줄 곳도 없었다.
조금씩 받는 봉급은 그를 잠시나마 위로해줄 유흥장에서 탕진해 버렸다. 그에게는 군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보람도 없었고 생에 대한 애착이나 장래의 희망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하루살이 인생 바로 그것이었다. 생이 저주스러웠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싶었고 누구에게나 반항하고 싶었고, 이유없는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가끔 부대에서 소총을 들고 탈영하여 저 세상 어딘가에 그의 울분을 폭발하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는 사격 훈련을 마친 후 부피가 큰 소총 대신 수류탄을 몰래 품안에 감추고 부대를 뛰쳐나갔다.
그러나 찾아갈 곳도 없고 그를 반겨줄 사람도 없었기에 그는 막연히 그가 성장한 지방을 향하여 기차를 타고 떠났다. 해가 져서 어둠이 깃든 후에 안동역에 도착한 그는 어느 허술한 술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식사로 시장기를 달랬다. 공복에 마신 술기운이 전신으로 퍼져갔다.
시계는 어느덧 10시에 가까워 이제 잠잘 곳을 찾아야 했지만 그는 어두운 밤길을 정처없이 걸었다. 그의 곁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였다. 저마다 가정을 향하여 가는 걸음들이 자기와는 전연 다른 부류의 인종들로 보였고, 자신은 마치 그들과 동화될 수 없는 완전한 이방인으로 느껴졌다. 깔깔대며 걸어가는 여성들의 웃음소리가 역겨웠고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부러움보다 심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얼마동안 그렇게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 걸어가는데 떠들썩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문화극장에서 마지막 상영을 관람하고 밀려나오는 군중들의 소리였다. 정다운 부부들, 사랑하는 연인들, 아쉬운 것없이 풍요롭게 마음껏 젊음을 구가하는 청춘 남녀들의 물결이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방으로 흩어져가는 군중들의 모습을 넋잃은 사람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이 찾아가는 보금자리들은 얼마나 아늑한 곳일까. 그래, 나는 이렇게 갈 곳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단 말이냐! 에잇 공평하지 못한 세상!’
그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오른손으로 왼쪽 안 주머니에 넣어둔 수류탄을 더듬었다. 묵직한 수류탄이 믿음직하게 손아귀에 잡혔다. 그것은 이제 그의 모든 불행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는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흥분에 휩싸이면서 순식간에 수류탄을 꺼내어 안전핀을 뽑았다. 취중이었지만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자각만은 또렷했다. 그는 오른손에 힘을 불끈 주었다. 이제 그 수류탄은 어느 특정 목표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과 극도로 불행한 자신의 삶에 대한 분노의 폭발로 던져지는 것이었다. 그는 군중 쪽으로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1968년 5월 18일 밤 10시 25분이었다. (다음 칼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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