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문인협회원)
배움의 두 가지 길
학문을 크게 나누면 유형물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형이하학(形而下學)과 무형(無形)을 대상으로 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배워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항상 두 가지 길이 뒤따른다. 배워서 익히 알게 되는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믿어야만 알게 되는 길이 있다.
전자의 길은 ‘3R’이 핵심인데 ▲Reading ▲Writing ▲Arithmetic으로
읽고, 쓰고,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만 하는 생활의 기본이 되고 요체가 되는 지식을 말한다.
이 세가지 터 위에서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과학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의 지식을 넘어 그 깊이와 폭이
넓어져 ‘이렇게 알아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하는 의문의 꼬리가 꼬리를 물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 같은 근본적 질문의 답을 찾고자 어떤 신성한 대상을 절대화해
이 대상을 하나님으로 믿고 숭배하며 신(神)의
자비와 구원에 대한 소망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
종교(宗敎)에서 종(宗)은 ‘으뜸’을 말하기에 결국 종교는‘으뜸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그러면 ‘으뜸가는
가르침’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믿어서 알게 되는 가르침’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인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는 ‘알기 위해 믿는가, 아니면 믿기 위해 아는가(Believe to Know or Know to Believe)’라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선행돼야 함을 갈파했다. 믿음은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로마서 10:9~10).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고
나는 그의 피조물임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편 23:1)’가
될 뿐 아니라 나는 진흙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가(로마서 9:20~21)
되는 관계임을 저절로 시인하게 된다.
성경 66권의
요약인 사도신조의 첫머리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선행돼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믿어도 내가 꼭 믿어야지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믿어 줄 수가 없음을 강조한다.
‘내가 믿사오며’의 귀한 ‘나’를 성경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구별해 주셨음을 의미한다.
이
구별된 사람을 다른 말로 성도(聖徒)라 부른다. 성도의 원어는 헬라어로는 ‘하기오스(ἁγιος)’,
히브리어로는 ‘코데쉬(Kodeshe)’라 하는데 ‘구별 중의 구별’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있는 71억명
가운데 한 사람인 나를 제한적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탈바꿈하게 해준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은혜라 하겠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그 분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우리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히브리서 11:6). 이 상이 곧 영원히 사는
‘영생’이란 상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네게 복을 명하였나니 곧 영생(시편 133:3)’이라고 말했고, 요한복음에는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했다. 이 같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야고보서1:6). 이처럼 믿음은 보배로운 것임을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강조하고 있다. dongchin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