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오월의
속삭임
오월이다. 봄은 화사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꽃밭에서 들에서 산에서 저들끼리 즐기다가 멀어져 간다. 사람들은 처음 겪는 역병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 갇혀 봄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불안한 눈길들을 멀리 서서 주고받는다.
누구를
탓하랴. 저마다 잘못한 일들을 반성해야 된다 하고, 자연을
멋대로 파괴한 인간들의 오만이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탓한다. 부족함 없이 평온한 일상을 감사한 줄
모르고 지냈다며 고개를 숙인다.
인간은 이제라도 그 끝없는 탐욕을 멈추지 않으면 공멸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큰 소리도 들린다. 그러다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거침없는 횡포에 모두 죄인인 듯 기가 죽는다.
의기양양하던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깨달으며 삭막해가는 세상에서 하늘의 자비를 간구한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칭송받던 오월은 느닷없이 맞닥뜨린 죽음과 고통을 짊어지고 얼마나 놀라고 힘겨웠을까.
그러나
오월은 ‘이 또한 지나갈 것을’알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어둡고 비참한 지구촌의 슬픔을 감수하면서 연두 빛을 키우고 초록의 눈을 틔우며 주저앉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더욱 푸르러진 하늘은 힘내라고 속삭이고 훈훈한 꽃바람은 상한 심령들의 창백한 볼을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반짝이는 별들, 휘영청 밝은 달은 어둠 속에서야 빛을 볼 수 있다고
따뜻한 눈짓을 보내온다.
풀벌레의 미세한 움직임, 나뭇잎의
흔들림, 들꽃들의 작은 미소, 꽃잎 떨어지는 울림, 온갖 생명들의 소리가 의미를 담은 속삭임으로 이어지게 한다. 드디어
향기로운 꽃망울을 터뜨리기까지 받들어 주었으리라. 꽃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환청일까?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누가 말했더라? ‘천사들의 뺨 같은 꽃잎’이라고. 오월은 천사의 뺨 같은 청초하고 순결한 꽃을 아낌없이 피워낸다. 상냥한 여왕은 생명의 신비를 상처 입은 가슴 가슴에 선물하고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한다.
이른
봄비의 목욕으로 부드러워진 흙에서 고향의 숨소리가 들린다. 사람 냄새도 난다. 자연의 호흡을 느끼며 들숨 날숨을 함께 한다. 바깥 아우성에 잠시
귀를 닫고 손바닥만 한 채마 밭을 일구는데 열중한다.
돌을 골라내고 가랑잎도 털어낸다. 일그러진 잔디밭을 갈아엎고 텃밭을 늘리는 작업은 숨이 차다.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투정하면서도
노동의 수고와 신성함을 만끽한다. 현대문명의 자투리로 쌓인 온갖 오염물질의 해독은 자연밖에 없다고 했거늘, 깻잎과 상추, 풋고추와 토마토를 심으며 내 얼룩진 마음을 헹궈낸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서늘해진 가슴으로 소박한 뜰의 나무들을 살펴본다.
제법 초롱초롱 반짝이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그래도 사랑은 좀 있나 봐, 스스로 대견해 미소
짓는다.
어느
식물학자는 식물에도 생체의 리듬이 있다고 했다. 나무들이 연두 빛을 뿜기 시작할 때 귀를 대보면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린단다. 나도 봄의 기운을 얻고 싶어 나무 등에 귀를 바짝 대고 눈을 감은 채 소리를
기다린다.
물소리라기보다 어린 잎사귀들의 희망 실은 가늘고 맑은 노래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아, 가슴이 울렁거린다. 머지않아
찬란한 햇빛을 받아 내 작은 정원의 몇 그루 나무엔 풍성한 잎들이 날개처럼 팔락이며 기쁨으로 술렁거리리라.
오월의
속삭임은 하나같이 나직하고 겸손하다. 부드럽고 정답다. 나는
오월의 자연이 베푸는 큰 덕목을 터득하며 기뻐한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순결. 그렇다. 오월이 최고의 계절로 사랑받는 이유는 겨울의 찬바람을 이겨낸 생명들이 흙이 빚어낸 꽃으로 잎으로 어우러져 아롱진
축제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타샤는
말했다. 오월엔 초록의 들판에서 돌능금나무에 붉은 꽃이 피고 물망초와 수선화와 제비꽃이 핀다고. 오월의 신비를 찬양한 이가 어디 한 두 사람이겠는가.
색채
감각을 연구한 조영수 박사는 초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맑고 깨끗한 초록의 힘은 평온과 젊음이다. 건강을 상징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또한 순수, 성장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부활을 의미한다.’ <색체의 연상>에서.
착한
오월은 어린 녹색이 진초록으로 익어갈 몫을 유월의 햇살과 바람에게 넘긴다.
동동거리던
일상이 정지된 요즘 세상,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 사이는 멀어졌고 마스크로 가린 입은 말수를 줄게 한다. 세상이 관계로 이뤄진다면 삶은 즐거움을
많이 잃었다.
대신, 거리 두었던 자연과 친밀해져 새로운
눈과 귀로 창조물을 대하게 된 것은 내게 적잖은 소득이다. 지금 내 오월의 뜰에는 꽃과 푸성귀 그리고
초록 이파리들이 희망의 속삭임으로 사랑을 실어 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