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그 나무의 품
저만치 그 나무가 오늘도 나를 반긴다. 내가 지나다니는 길에서 왼편으로 시선을 던지면 미술과 건물 옆에 그 나무가 있다. 벚꽃의 잔치도 끝나고 화려한 로디도 지고 지금은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비를 부르는데 이 모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무는 한결같이 푸르다.
나무 아래 학생 두어 명이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 앞엔 팔을 걷어붙인 젊은이들이 프리스비에 웃음을 담아 공중으로 날려 올린다. 날아가는 프리스비 뒤로 모든 풍경을 내려다보는 나무의 표정이 너그럽다.
몇 해 전 어느 날 남편이 주워온 예사롭지 않은 모양의 둥근 솔방울에 마음을 빼앗겼다. 모난 데가 없어 손으로 감싸 쥐기 좋았다.
인터넷에서 똑같은 모양의 솔방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레바논 백향목((Lebanon Cedar)의 솔방울이라 했다. 그때부터 나무에 대한 나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경을 읽다가 종종 레바논 백향목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무는 권위와 능력, 때로는 교만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의인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다.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요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나무는 많은 장점을 가졌다. 고산 지대의 열악한 환경에서 웃자라지 않아 견고하다. 뿌리가 깊어 잘 죽지 않고 수명이 길다. 향이 진해서 벌레가 끼지 않는다. 페니키아인들은 이 나무로 배를 만들어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다윗 왕은 유독 이 나무를 좋아했나보다. 그가 궁을 지을 때,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과 궁을 지을 때도 두로의 왕 히람은 레바논 백향목을 뗏목으로 엮어 이스라엘로 보냈다. 이는 히람이 다윗의 충직한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 모든 나무의 특성 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속에 되살아나는 문구가 있다.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품을 넓힌다.”
그러고 보니 레바논 국기에 있는 나무는 높이와 넓이가 거의 같다. 소나무과의 다른 나무들 중에도 유난히 넉넉한 품을 가졌다. 특히 옆으로 뻗은 가지의 곡선이 수려하다. 그 가지의 끝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속 창조주가 아담을 향해 뻗은 손가락을 닮았다.
UW 수목원에 갔다. 수목원 지도에서 레바논 백향목 두 그루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마을과 접한 수목원의 가장자리에 손잡은 듯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원뿔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었다. 솔방울 두어개가 눈에 띄는 아직 어린나무였다. 그에 비하면 UW 캠퍼스, 미술과 건물 옆 그 나무는 청년의 시기를 넘어선 듯하다. 나무는 건물의 키를 넘어섰고 한쪽 가지가 건물의 창에 손가락 끝을 뻗었으니 말이다. 나무는 이미 품넓히기에 들어선 것이다.
좁은 마음에, 시시비비에 지쳐 갑갑한 날, 캠퍼스를 걷다가 나무 옆을 지난다. 나무가 자꾸 나를 쳐다봐서 뺨이 부끄럽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애당초 남을 자로 재고 판단할 자격도 없었던, 본연의 나를 발견한다.
용서와 은혜가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다. 서운하다. 밉다. 뭐 이런 자잘한 마음들을 그 바람에 얹어 보낸다.
희망을 가득 짊어진 학생들이 발걸음도 가볍게 내 옆을 지나간다. 내가 그들의 나이였을 때는 사람의 마음이 나이가 들면 절로 넓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나이가 들었으나 종종 어린이용 침대로 다시 기어들어가 몸을 요리조리 뒤척인다.
내게는 매일 마음을 비추어볼 거울이 필요하다. 나무처럼 저만치서 넌지시 눈치를 주는 친구도 필요하다. 나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슬쩍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가 저만치서 너울너울 손짓을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
성탄이 다가오는 어느 날, 호랑가시나무 가지를 꺾어 리스를 만들었다. 반짝이는 빨간 방울도 달았다. 그래도 어딘가 허술해 보였다. 식탁 위 바구니 속에 앉은 솔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리스 위에 솔방울을 얹어 놓으니 마침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리스 위에서 솔방울이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