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도연의 자기반성은 통렬했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감독 박흥식) 언론시사회 이후 "역시 전도연은 전도연"이라는 호평에 반하는, "연기가 완벽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라는 말로 엄격하게 자평했다. 그 이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럼에도 인상 깊었다"는 말에 "그건 드라마가 탄탄했던 연기 외적 요소 덕분"이라고 정정하곤 했다.
대의를 실천하려는 신념 때문에 감정이 거세된 여자, 사랑하는 딸 홍이(김고은 분)에게 그 운명을 대물림 해야 하는 어머니 월소. 그런 비극 가운데 정적인 감정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맹인 연기와 무술 연기를 함께 해내야 하는 사중고(四重苦)와 그렇게 되풀이 되는 연기의 한계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이 됐다.
놀랍게도 전도연은 '타협'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액션 연기가 생각했던 완성도에 미치지 못하자 무술 감독이 외려 액션 전문 배우가 아니니 검에 담아야 할 감정 연기를 보여주면 된다는 말에 힘을 냈다며, 영화에 그려진 액션 연기와 감정 연기의 밸런스를 어떻게 적절하게 할당시킬 수 있었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제일 행복할 때가 연기할 때이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순간 무서워질 때가 많다"는 말은 '칸의 여왕'이라는 가장 화려한 수식어를 지닌 여배우의 고백이었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연기의 숭고함을 인식하고 객관적인 성찰과 자각을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는 그다. 영화 '해피엔드'로 배우의 사명감을 갖기 시작해 벌써 16년이라는 세월을 그렇게 지나왔다.
Q. 언론시사회에서 스스로의 연기에 대해 "완벽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고 했다. 외려 전도연이 보여준 연기의 깊이에 대해 호평이 많았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자기반성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A. 처음엔 큰 화면으로 보니까 너무 어색해서 못 보겠더라. 액션도 그렇고 맹인 연기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감독님이 눈을 깜빡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시신경이 죽어있는 상태를 연기해보려 노력했다. 그런데 노력을 해도 막상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 눈을 오랫동안 깜빡이지 않고 참아야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워낙 샷마다 호흡이 너무 길어서 힘든 부분도 많았다. 찍고 나면 눈물이 흐르고. (웃음) 또 고전무용 동작이 있는 무술은 저만 하는 거라 고전무용도 배웠다. 칼도, 옷도 길고 주변 환경도 여의치 않고 어쩔 수 없이 타협해 가면서 찍은 부분이 많았다.
Q. 연기에서 만큼은 완벽을 추구하는 배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에게 다소 엄격한 편인 것 같다. A. 엄격하다면 엄격하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난 배우니까 욕심이 있다. 아무리 해도 만족은 없는 것 같다. 주위에서 연기로 호평을 한다는 건 드라마가 탄탄하고 좋았기 때문인 것 같다. 무협 장르이지만 드라마에 매료될 수 있는 장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족했던 연기를 커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Q. 드라마가 강하다고 하지만 무협 장르인 만큼 맹인 연기와 감정 연기는 물론, 액션 연기도 상당히 중요했을 거다. 월소의 액션이 여타 배우에 비해 정적인 편이긴 하지만 깊은 감정 연기도 함께 요구됐기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A. 와이어 액션이 정말 많았다. 와이어를 기초적인 것부터 배웠는데 재미있으면서도 너무 힘들었다. 와이어를 탄다는 건 골반은 물론 몸의 모든 기능이 틀어진다는 것이었다. 큰 부상들은 없었지만 타박상 같은 잦은 부상들이 많았다. 액션의 완성도 때문에 많이 고민을 했었는데 무술 감독님께서 '당신은 액션 배우가 아니고 배우'라고 다독여주셨다. 검의 월소를 담는 감정을 보여주면 된다는 말에 힘이 났다.
Q. 월소의 비정한 모성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우로서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어땠나. A. 비정한 모성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람이 많더라. 자신의 선에서 대의를 지키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딸 홍이에게까지 대물림을 하지 않나. 나 역시도 그런 부분이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그때에도 지금도 언제나 협은 존재한다고 하더라. 하지만 협을 지키는 사람은 없지 않냐고 하셨다. 그만큼 월소는 유일무이한 캐릭터였던 셈이다. 고지식하지만 자신이 정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믿는다. 협이란 그런 거였다.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월소를 이해했던 것 같다.
Q. 월소 때문에 홍이 역시 대의를 실천해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홍이를 연기한 후배 김고은과 호흡은 어땠나. A. 난 그렇게 건방지지 않았다. 하하. 신인 같지 않은 신인이더라. 당차고 당돌하고 욕심도 있는 친구인데 사실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현장에서 연기를 하고 있을 때는 선후배 관계가 아니라 동료배우이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감정을 소통하면서 자기감정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하고 욕심 부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 그렇게까지 프로페셔널하지 못했고 오히려 진짜 아기 같았더라.
Q. 아무래도 인물이 지닌 무게감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조언을 해주기도 했나. A. 난 감히 조언을 하지는 않는다. 연기하는 본인이 누구보다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단지 잘 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 밖엔 없었다.
Q. 이병헌과는 영화 '내 마음의 풍금' 이후로 16년 만에 재회했다. A. 그동안 이병헌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작품을 좋았거나 캐릭터가 매력 있으면 팬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하. 첫 대면 때 만나자마자 '도연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라고 하는데 그냥 먼 시간이 성큼 어제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리 만큼 사적으로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만나기 전에 더 떨렸다.
Q. 이병헌과 연기 호흡을 맞춰보니 어떤가. 특별한 시너지가 느껴졌을까. A. 액션 연기를 할 때는 시간에 쫓기고 합 맞추는 데 집중하느라 서로 배려하기 힘들더라. 그런데 감정신에 들어갔을 때는 서로 감정을 방해하지 않게 기다려주고 배려하면서 촬영했다. 외려 감정신 찍을 때는 좀 편했던 것 같다. 사실 이병헌이 액션 연습에 가장 늦게 합류했다. 워낙 액션 연기를 많이 했던 배우라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우리가 기대했던 몸놀림이 아니더라. 하하. 다들 너무 당황했다. 그런데 마무리 동작을 하면서 '오빠 멋지지?'라고 자화자찬하는데 그때 정말 멋있다고 느꼈다. 하하. 이번에 다시 연기하면서 역시 좋은 배우구나 새삼 느꼈다. 카리스마가 있는 느낌 있는 배우다.
Q. 감정신이 조금 더 수월했다는 건 연기 표현의 묘미가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될까. A. 표현하는 연기, 그렇지 않은 연기를 나누는 묘미를 생각하기 보다 표출하는 거든 절제된 것이든 캐릭터에게 집중하려 노력하는 것 같다. 연기할 때도 정말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워지기도 한다.
Q. 연기가 때론 무서워진다는 말의 의미는. A. 배우라는 직업이 그런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날 땐 화려해 보이지 않나. 좋은 것만 보이지만 결국 좋은 걸 보여주기까지의 시간을 메우는 건 자기 자신이더라. 참 외롭기도 하다. 창의적으로 혼자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제일 행복할 때가 연기할 때이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순간 순간 무서워질 때가 많다.
Q. 전도연 앞에는 지금 기존의 여배우들이 지닐 수 없는 최고의 화려한 수식어가 다 붙는다. 그런 주변의 기대가 무겁진 않은지. A.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연기를 할 때가 있었지만 그때는 이제 지나간 것 같다. 아무래도 남의 기대를 생각했을 때보다는 좀 더 내 자신에게 집중했을 때가 훨씬 조금 더 행복하더라. 이젠 주위의 기대에 대한 부담이라는 걸 덜 갖는 편인 것 같다. 외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냉정해지기도 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더라.
Q. 그런 계기를 지나던 시기가 언제 쯤이었을까. A. 딱 어느 작품이라고 명확하게 시점을 얘기할 순 없지만, 대략 '해피엔드' 때였던 것 같다. 주변 뿐만 아니라 영화를 하는 많은 분들이 나에 대해 우려를 했다. 저 작품을 왜 하느냐고 했지만 배우로서 '해피엔드'를 해야 하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땐 나 역시 20대였다. 어릴 때 꿈이 현모양처였어서 사랑과 결혼에 환상이 많은 나이이기도 했다. 극 중 인물인 최보라를 이해하기 정말 힘들었지만, 내가 그 인물을 이해하지 않으면 누기 이해하겠나 싶더라. 그때 어렵게 연기를 했던 이후 내가 선택한 작품에 대해 옳다고 생각하는 걸 끝까지 밀고 나가게 된 것 같다. 비록 월소가 협을 실천한 것처럼 100% 완벽한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