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원)
고국에서의 설날 추억
어린 시절의 설날은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음력 설날이 가까워지면 집집마다
엄마들이 바빠졌다. 엿(조청), 수정과, 식혜 등 평소에 자주 먹지 못했던 음식들이
며칠 전부터 만들어진다.
이런 음식들은
미리 엿기름을 만들어 햇빛에 말리는 등
복잡한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모두 어머
니 손을 거쳐야 했다. 그때는 집집마다 울리는 떡메치는 소리로 온 동네가 들떴다. 시루떡은 절구에 쌀을 빻아서 채로 쳐서 만드셨다.
우리는 시골에 살아서 그랬겠지만 어머니가 집에서 만드셨다. 인절미는 시루에 찐 찰밥을 절구에 넣고 떡메로 쳐서 만들었다. 머슴이 떡메로 치면 어머니가 손을 재빨리 절구에 넣어 떡덩이
를 뒤집어 골고루 섞이게 했다.
어린 나는 어머니 손이 떡메에 맞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둘이서 박자를 맞추는지 다치지 않았고 인절미는 맛있게 만들어졌다. 흰떡은 떡대를 만들어 안반 위에
놓고 모형이 있는 틀을 위에서 누르면 무늬가 새겨졌다.
산자는 여러 색깔로 미리
만들어 방 따뜻한 곳에서 말려서 기름에
튀기면 부풀어 오른다. 그 위에 벼를 튀긴
튀밥을 조청으로 붙였던 것 같다. 완성된
후에 보면 튀밥이 하얀 꽃처럼 예쁘고 맛
도 고소하고 바삭바삭했다.
어머니가 만든 시루떡은 맛이 특별했다. 집집마다 떡을 만들었지만 그릇에 떡을 골고루 담아
친척집에 돌리셨다. 가족들에게 새해에
설빔을 입히기 위해서 틈틈이 옷까지 만드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하셨을지 의아하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예수 믿는 가정이
별로 없었다. 대다수 집들이 미신을 섬겼기에 길을 지나다 보면 가족이 없는 귀신이 먹으라고 밥과 나물 반찬 따위를 차려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예수 믿지 않는 가정들은 아침 일찍 음식을 차려 놓고 먼저 조상에게 제사하고 먹는다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조반을 마치고 부모님께 세배 드린 후
작은 할머니 댁을 필두로 친척 집에 다니며 세배했다. 우리 동네에는 친척들이 많이 살았다. 가는 곳마다 먹을 것과 세뱃돈을 주셨다. 어머니는 세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차려주고 치우느라 설날에도 행주치마 벗을 틈이 없었다. 좀 한가해졌다 싶으면 작은 상에 몇 가지 음식을 차려 들고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신 작은 할머니께 세배하러 가셨다.
지난 날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들의 지혜와 부지런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언젠가 한국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난다. 명절에 부모 댁에 세배하러 다녀온 후 이혼하는 부부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옛날 어머니들이 들으시면 뭐라고 말하실지 궁금하다. 사실 나도 어려서는 잘
이해못했던 부분들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이 훈훈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된다.
우리 가정은 미국에 이민 와서 살지만
한국적인 면이 상당히 많다. 추석에는 송편을 만들고 설날(비록 양력설이지만)에는 한복을 입고 세배한다. 어린 손자 손녀들이 부모를 따라 세배하면 자세가 어색해 웃지 않을 수 없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세련되고 한국어 인사말도 제법 잘한다.
우리 애들과 조카가 어렸을 때 미국 아이
친구를 데리고 설날에 찾아와 세배했다.
할아버지가 세뱃돈을 주자 미국 아이가
자기도 해보겠다며 대충 요령을 배운 후
할아버지에게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았다. 아마 두고두고 즐거운 추억이 됐을 것 같다.
이젠 손주들이 청년이 다 됐다. 그래도 설날에 다른 모임에 가지 않고 가족모임에 끼는 모습이 고맙고 기특하다. 이 날은 할아버지의 지갑이 열려 ‘귀여운 떼도둑’에게 기쁘게 털리는 날이다.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설날 떡국은 내 손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다. 같이 예배드리고
신년계획도 나눈다. 낯설고, 말설고, 풍습
선데서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