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성도(聖徒)의
죽음
성경 66권의 주제는 4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죄 사함이고, 둘째는 구원, 셋째가 부활, 그리고 마지막 주제가 영생이다. 하지만 이 4가지는 주제는 하나같이 죽음과 관련돼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로 이것은 공리(公理ㆍ Axiom)에 해당하는
명제(命題)다. ‘인생백년
균지사 개사야(人生百年 均之死 皆死也)’라는 말이 있다. ‘백년이라 해도 모두 다 죽는데 남은 시간 유익하고 보람되게 살아가자’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간다”고 했는데(여호수아 23:14) 여기서 세상은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예외가 없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다윗 왕도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누가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는
예외자요, 구별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바로 우리를
구별된 사람으로 갈라놓기 위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냈음을 말해주고 있다.(골로새서 1:13) 이 구별된 사람이 바로 성도(聖徒)인데 헬라어로는 ‘구별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기아조(ἁγιάζω)’에서 온 ‘하기오스(ἅγιος)’란 낱말로 ‘구별된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지구 상에 사는 많은 인종을 한동안 백색인, 황색인, 갈색인, 흑색인, 그리고
적색인으로 구분하기도 했고 또 그 분류 기준을 피부색, 얼굴 면적, 코에다
머리카락 형태로 구분하기도 했다. 현재는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등 셋으로 구분한다.
다양한 인종이 오대양 육대주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 하더라도 죽음이란 모두가 가야 할 길이기에 ‘살다 죽었다’는 이 두 마디로 요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고린도후서 4:16-18) 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예비된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케 해주신다는 것이다.
짐승들은 고향을 모르나 사람만은 못 잊는 것이 바로 고향이다. 성경은 이 고향을 본향(本鄕)이라 하는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를 너의 본디 고향인 본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했다(예레미야 42:12).
죽음이 생존의
끝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직(下直)했을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할 곳이 본향이라면, 본향으로 돌아가는 죽음은 성도들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 품에 안기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다(시편 116:15).
바로 이것이 구별된 성도와 구별되지 못한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라 하겠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 인정될 때 그 가치가 돋보인다. 에머랄드가 색채로, 다이아몬드가 광채로, 그리고 수정은 투명도로 뛰어남을 인정받는다.
우리 성도들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겨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다고 했을 뿐 아니라(시편 116:8) 우리 만족이 다만 하나님께만 있게 해주신 것이다(고린도후서 3:5). 성도의 죽음이 귀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