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대호(34)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베일을 걷어보니 이대호가 입을 유니폼은 미국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였다.
시애틀은 4일(한국시간) "이대호와 스프링캠프 초청권이 포함된 1년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고 공식 발표하며 40인 로스터에 이대호를 포함시켰다.
같은날 이대호의 국내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몬티스 스포츠 그룹도 계약 사실을 알렸다. 구체적인 세부 조건은 밝히지 않았다.
애당초 예상했던 메이저리그 보장 계약은 아니었다. 미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대호는 빅리그에 입성해 일정 조건을 충족해야 1년 최대 400만달러(약 48억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대호에게 시애틀은 불리한 구단이다.
일단 시애틀의 제리 디포토 단장은 "이대호는 우타 파워 히터로 1루수 경쟁이 가능한 자원"이라며 "한국과 일본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 능력을 우리 팀에서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 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전 1루수가 막강하다. 시애틀은 오프시즌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트레이드로 1루수 애덤 린드를 영입했다.
지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메이저리그 통산 10시즌을 뛴 린드는 통산 1102경기에 나가 타율 0.274, 166홈런, 606타점, OPS(출루율+장타율) 0.797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에는 149경기에 나가 타율 0.277, 20홈런, 87타점, OPS 0.820의 성적을 남겼다.
기본적으로 매 시즌 20홈런을 때려줄 수 있는 좌타 거포다.
이대호가 현실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백업 자원에는 우타자 헤수스 몬테로, 스테판 로메로, 가비 산체스 등이 있다. 결국 주전 경쟁이 아닌 플래툰 경쟁을 펼쳐야 하는 셈이다.
송재우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뉴스1과의 통화에서 이대호에 관해 "냉정히 말해서 보험용"이라고 봤다.
그는 "처음부터 포지션 경쟁에 유리한 팀으로 가면 좋았겠지만 이대호가 소화할 수 있는 포지션이 1루수나 지명타자이다 보니 들어갈 수 있는 자리 자체가 한정돼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대호는 지난해 11월3일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하면서 "프로는 돈으로 보장 받지만 내 꿈은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이다. 일본에서 받았던 연봉에 못 미치는 금액이 나오더라도 도전할 것"이라며 "야구 선수는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어야 행복하다. 최대한 많이 출전할 수 있는 팀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도 연봉은 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된다는 입장이었으니 '돈'이 선택에 영향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출전 기회'다.
출전 기회를 중요한 조건으로 꼽았던 이대호가 출전 기회가 빠듯한 시애틀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갈 곳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 시즌까지 2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꾸준히 잔류 러브콜을 보내왔다.
물론 이대호가 "처음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계획한 것은 갈 수 있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하긴 했다.
그래도 최근 소프트뱅크 오 사다하루 구단 회장까지 나서서 "스프링캠프 도중 합류해도 좋다"며 적극적으로 구애했고,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소프트뱅크는 이대호에게 3년 총액 18억엔(약 184억원)이라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이대호가 무조건 빅리그에 가겠다고 밝혔고, 다년계약과 어느 정도의 연봉을 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시장에서 흡족한 조건을 내놓은 구단이 많지 않았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을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소프트뱅크에게 마냥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으니 결단을 내려야 했다"며 "시기적으로 더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대호는 늘 주전으로 뛴 선수다. 시애틀의 조건이 절대 유리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대호는 계약 후 "메이저리그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팀내 주전을 확보하고 보탬이 될 수 있는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 충분히 그 목표를 이뤄 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각오를 밝혔다.
꿈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와 자신감으로 마이너계약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저런 상황상 불가피해 자존심을 지키고자 계약했을 수도 있다.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이대호는 스프링캠프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줘야 개막 25인 로스터에 들 수 있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스프링캠프에 합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있다. 그러나 이대호 본인이 소화할 수 있는 포지션에는 이미 빅리그에서 검증된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이어 "린드를 비롯한 경쟁해야 하는 선수들이 부상을 입거나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이상 주전 확보는 어렵다"며 "스프링캠프에서 아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본인의 실력과 함께 약간의 운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