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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문학-공순해 수필가] 수군수군 살기



공순해 수필가

 
수군수군 살기
 
 
해가 바뀌었다. 청마의 기운을 빌어 힘차게 살아보자고 덕담 나눈 게 엊그제련만. ‘청마하면 꼭 떠오르는 분, 유치환.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나부끼던 분. 그래서 청마 선생은 지난 한 해 지하에서 무척 시끄러워하셨으리라

하면 올해 이 분처럼 시달릴 분은 또 누굴까? 올해는 양이란다.

. 상형문자 羊은 상서로움(), 착함(), 등에 이어 기름(), 의로움(), 아름다움()으로 계속된다. ? 큰大+양羊? 내가 보기엔 大는 큰 진리고(그 핵심은 복음이다), 羊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러므로 美가 큰 진리로 오신 그분을 상형한 문자라 한다면 팔이 지나치게 안으로 굽은 걸까? 희생만큼 아름다운 게 어디 있으랴. 희생양 예수님. 아름다운 예수님. 하니 양의 해에 제일 많이 시달릴 분은 틀림없이 예수님이 되시겠다.

그래서 말발굽 아래 2014년이 사라지자마자, 양을 따르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봤다. 십자가를 지고 날 따르라 하셨으니 우선 그걸 지고 봐야겠지. 십자가는 과거의 날 깨고 져야 하는 것. 날 깨기 위해선 말씀에 들어야 한다

로마서 1장으로 들어가 본다. 거기 나열된 인간의 죄들이 겁나서 읽다가 책을 덮어 버린 적이 있다. 하나도 걸리지 않는 게 없을 만큼 적나라하게 나열된 죄목들. 그중 가장 오금 저리게 하는 죄목은 수군수군하는 자요. 아무리 다른 죄목에 난 죄 없다고 뻗댄다 해도 이 대목에 와선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요즘 신조어 중에 지적질이 있다. 지적하다에 습관을 나타내는 명사형 어미 ㅡ질을 붙여, 누군가 잘못했거나 실수했을 때 자주 지적하는 습관을 빈정대는 유행어다. 나는 학생 시절에 이미 이 지적질의 반열(?)에 들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수업 시간에 잘못된 설명을 듣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어서. 오도(誤導)를 알면서 그냥 넘어가라고? 수업 준비 덜해 온 교수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정말 싫었던 나는 뾰족한 목소리로 오류를 지적하곤 했다.

교수나 목사만큼 파급력 높은 직업도 없다. 이들이 대중을 한번 오도하면 그 교정에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이에 못지 않게 파급력 높은 분야는 매스 미디어다. 그들의 무심한 실수가 불특정 다수에게 각인돼 그게 대중의 신념(?)으로 뿌리내린다면, 이건 오도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게 된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교수와 학생 사이의 지적질은 애교 선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매스 미디어는 나름 완강한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하기에 지적질이 별무효과다. 외려 지적질한 쪽과 당한 쪽의 사이만 뻘쭘하게 될 뿐. 게다 그쪽에서 요즘 말로 해서 소위 갑질로 나오게 될 경우, 도리어 이쪽이 수세로 몰리게 된다

비유컨대 이수(泥水)에 맑은 물 한 컵 붓기가 돼 버리고 만다. 이때 바로 수군수군하는 자요의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수군수군은 산양 뿔만큼 힘이 세다. 그래서 멀쩡하던 가정을 깨 놓기도 한다. 교회에 모여 중보 기도한답시고, 남의 집 가정사를 다 까발려 여기저기 퍼 나르며 수군댄 결과 가정이 두 쪽 났다. 그랬음에도 이게 죄인지 모르고 그들을 도왔다고 굳게 믿으니 이 딱함을 어찌하랴

또 목적이 배제된, 인간적인 친밀함으로 모이는 공동체는 반드시 갈등, 분열, 파당을 만들어낸다고 어디선가 읽었다. 이런 경우 뒷담화, 수군수군이 빠질 수 없게 된다. 여기엔 꼭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래서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자기 신념과 결정이 옳다고 믿는 인간을 구속(救贖)하기 위해, 이천 년 전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분은 십자가를 지고 그 죄를 죽였다.

그럼에도 죄는 아직도 프로메테우스의 간처럼 매 순간 생생하게 다시 솟아나 교만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너보단 내가 낫다는,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해야겠다는 욕망이 남아 있는 한 인간은 평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행복하기 위해 산다며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사랑하기 위해 산다며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수시로 어깨가 처지고 고단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삶을 부여잡고 고개 숙여 울며, 삶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처럼 지상에 삶을 한 자락 펴고 사는 한, 교만과 나약함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은 너도 나도 도저히 이 수군수군의 죄를 끊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젠 수군수군하더라도 법도, 아니 시쳇말로 메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당장 발끈하지 말 것. 지적도 유머러스하게 할 것. 마무리는 훈훈하게, 이 정도면 될까? 욕망은 자제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매사를 판단하면 선()에 가까워지게 될까? 아무튼 구속해 주신 분이 계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니 살아 볼만하지 않은가. 올 한해도 계속 羊을 성가시게 하며, 羊에게 읍소하며 살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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