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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수필-염미숙] 야키마 마트



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야키마 마트
 
 
서랍 정리를 하다가 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 오래 전에 부치지 못한 카드 속에는 받는 분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핼로윈이 지난 뒤 문밖에 놓인 호박처럼, 고백하지 못한 사랑처럼, 시기를 놓쳐버린 카드는 처량하다.

빗길을 헤치며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오는 길.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동네로 접어들었다. 야키마 마트의 불빛들이 환하게 반긴다. 올해의 마지막 장사, 크리스마스 트리를 팔고 있었다

그래! 곧 크리스마스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가게는 문을 굳게 닫고 내년 봄까지 긴 겨울잠에 들어가게 된다. 겨우내 가게 앞을 지나며 나는 수선화와 튤립이 마중 나오는 새 봄을 목매게 기다리게 될 것이다.

3월이 오면 가게는 온통 연둣빛이다. 모종과 꽃씨들이 진열대에 올라앉으면 설레는 맘으로 여린 잎들을 응원하며 괜스레 이 골목 저 골목을 서성거리는 것이다. 땋은 머리에 코걸이를 한 청년, 넉넉한 인상의 아주머니, 연로한 할머니 점원까지 모두 부지런히 움직이는 가게에서 사람들은 모두 이웃이 된다.

여름이 오면 가게는 점점 화려한 옷을 입는다. 1달러에 대여섯 개나 주는 옥수수를 만날 수 있다. 흙 묻은 시골 출신 피망들은 값이 싸다. 뚱뚱하고 날씬한 녀석들, 가끔은 혹 달린 녀석도 볼 수 있다. 보랏빛 붓꽃 한 묶음은 방금 밭에서 잘라온 듯하다. 풍성한 여름과일 중 천도복숭아 맛은 유난히 새콤달콤하다.

핼로윈이 다가오면 가게는 온통 오렌지 빛깔이다. 허술하게 차려 입은 허수아비가 스산한 바람으로 손님을 부른다. 커다란 호박들은 덩치자랑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알록달록 스쿼시에 자꾸만 손이 간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가게는 온통 초록이다.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 나무들이 줄지어 사열을 받고 있다. 바늘처럼 솟은 수많은 잎은 동글동글 백열전구 빛으로 솔 향기를 뿜어낸다. 누구의 눈에 들어 어디로 실려갈 것인지 기다림 속에 겨울 밤이 깊어간다. 연두로 시작된 한 해가 초록으로 마무리되고, 화살처럼 지나온 또 한 해를 뒤돌아본다.

부칠 시기를 놓친 카드는 갈 데가 없다. 무용지물이다. 호박은 핼로윈에, 크리스마스트리는 성탄에 아름답다

봄볕은 싹이 돋게 하고, 가을볕은 호박을 익게 한다. 씨 뿌리는 때를 놓치면 거두는 일을 할 수 없다. 거두는 때를 놓치면 공들여 길러온 열매가 입에 들어오기 전에 썩게 된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다. 감사를 표현하는 일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때를 놓치면 구겨진 카드가 된다. 뒤늦은 수습은 겨울에 싹을 틔우려는 일처럼 더욱 많은 시간과 땀이 요구되기 때문에.

야키마 마트를 지날 때 내게 주어진 또 한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감사한다. 젊음, , 재능, 관계, 코끝의 호흡까지도 내게 주어진 것들은 한시적이다. 영원한 내 것이 아닌 잠시 내게 맡겨진 것들이다.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적절한 쓰임으로 그 모든 것들이 허락된 시간 안에서 의미 있게 쓰이는 한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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