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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문학-김학인 수필가] 잎사귀의 메시지



김학인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잎사귀의 메시지
 
 
한 차례 비바람이 지나간다. 뒤뜰의 캐나다단풍나무 넓은 잎은 초록과 회색이 뒤섞인 얼굴로 바뀐다.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필사적으로 가지에 매달린 잎들은 더러 뒤집힌 채 버텨낸다. 푸름이 반짝이는 잎사귀의 뒷면은 핏기 잃은 회색이다.

녹색 물감을 앞면에 다 몰아주고 드러나지 않는 뒤쪽에서 실핏줄로 엽맥(葉脈)을 이어간다. 잎사귀가 보여주는 양보의 미덕이 문득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뭇가지가 수액을 빨아 올린 후에도 잎사귀들은 그 뒷받침의 힘으로 풋풋하게 시선을 끈다.

잎사귀들의 모듬살이는 아름답다. 족보나 고향을 따지지 않고 정답게 어울려 재잘거린다. 간지러운 듯 서로 몸을 비벼대며 한여름의 풍성한 잎을 흔들며 더위를 식혀준다. 봄에 연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태어나서, 여름에 성실하게 제자리를 넓혀가고, 가을에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화려한 옷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떠나간다. 푸른 이파리에 감싸여 돋보이는 색색의 꽃들. 꽃이 꽃다운 것은 잎사귀 때문이다

잎만 싱싱하고 곱다면 꽃 이상으로 쳐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상징으로<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라는 이름으로 우화집을 발간한 작가도 있다. 이파리들은 스쳐가는 바람을 휘파람으로 불어세워 길을 터주기도 한다. 그냥 흔들고 지나칠 양이면 파도소리를 내며 녹색물결로 뒤쫓기도 하고.

일 년이 넘도록 방주에 갇혀있던 노아에게 비둘기는 감람나무(올리브나무) 새 잎사귀 한 장을 물어다 준다. 새는 단순히 나무의 일부를 따서 물어온 게 아니다. 그 잎사귀엔 약속이 새겨져 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는 희망이 담겨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증표다. 순종과 인내로 묵묵히 견뎌온 긴 세월을 넘어선 소망의 메시지. 비둘기는 자비와 생명을 운반해온 것이다. 사랑은 가슴앓이를 하며 하늘 끝자락에서 오래 기다렸음에 틀림없다. 세계지도에 평화와 풍요의 상징인 감람나무 잎사귀를 그려 넣은 국제연합(UN)의 로고가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어느 날, 바다를 건너온 후배의 카드에서 날개를 활짝 핀 나비가 날아오른다. 아니, 그건 노란 은행나무 잎이다. 마로니에공원 벤치에 앉아 대학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가로수에서 내려앉는 잎사귀를 보며 괴인 그리움을 보낸다는 글귀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시를 쓰는 후배의 감성이 무디어진 나를 흔들어 깨운다. 정겨운 얼굴이 마른 잎사귀에 어른거려 나는 잠시 떠나온 자리에 되돌아간다. 은행잎 한 장이 연()을 팽팽하게 당긴다.

떨어져 내리는 담쟁이덩굴 잎을 자신의 생명과 동일시함으로써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화가 지망생 존시. 폐렴을 앓는 존시는 친구 수우에게 말한다.

“저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날, 나도 세상을 떠날 거야.

그런 존시를 살린 것은 유능한 의사가 아닌, 술에 찌들어 허풍만 일삼는 늙은 화가 버만이었다.

겉으론 볼품없이 실패한 화가지만 그는 꺼져가는 생명에 다시 불을 붙여준 위대한 화가였다. 눈보라가 사납게 유리창을 흔들던 밤, 높은 벽돌담에 담쟁이 한 잎 그려놓고 죽어간 버만. 덩굴줄기에 단단히 붙어있는 마지막 잎사귀에서 존시는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그 잎사귀는 기도다. 희생이 녹아있는 아픈 사랑이다.

오 헨리 <마지막 잎새>가 긴 여운으로 남는 것은 작가의 따뜻한 인간애가 작품 깊이 스며있기 때문이리라.

한 장의 잎사귀는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겸손하면서도 강인하다.

하늘을 향해 사방으로 뻗은 가지마다 촘촘히 달린 잎사귀들이 바람과 손을 잡고 나풀나풀 춤을 춘다. 그들의 춤사위가 더 없이 귀하고 성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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