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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문학-김윤선 수필가] 물개 자갈



김윤선 수필가

 
물개 자갈
 
 
영월의 실개천에서 살던 돌멩이 하나가 내 손에 들어왔다. 이름이 물개 자갈이란다.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내게 주고 싶다며 영희가 내 손안에 살며시 넣어주었다. 방금 물에서 나와 온몸의 물기를 털어낸 듯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게다가 날렵한 몸매가 금방이라도 내 손을 빠져나갈 듯해서 나는 얼른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호주머니 속에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단단한 촉감이 놈의 야무진 체구를 만지는 듯하다. 날렵한 몸매의 느낌도 좋다. 그러자 호주머니 속에서 졸졸, 실개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개천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솔 향도 난다. 강원도 사투리도 들린다. 그러자 자갈이 은근히 날 부른다.

“바깥세상은 어때?

아뿔싸, 제가 손이 있어? 발이 있어? 나는 얼른 놈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나니 영락없는 물개다. 쭉 뻗은 등줄기가 무척 야무져 보인다. 앙증맞은 엉덩이. 동글납작한 모양새가 일품이다. 게다가 양 옆으로 삐죽하니 내뻗은 뒷다리는. 무엇보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어, 누가 날 건드려, 하며 고개를 약간 뒤로 제친 채 거드름을 피우는 자태, 놈의 매력 포인트다. 자칫 한눈을 팔다가는 언제 물속으로 줄행랑을 칠 지 모른다. 누가 놈을 무생물이라 했던가.

놈은 어디서 태어났을까. 세상의 어떤 것도 빗겨가게 했던 거만하고 우람했던 바위, 하지만 그보다 더 힘이 센 존재가 있다는 걸 놈은 그날 처음 알았을 게다. 불어난 계곡물이 수없이 어미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그리고는 어미 품에서 우쭐거리며 노닥거리던 놈들을 순식간에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퍼붓는 물보라, 놈이 정신을 잃은 건 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깨어지고 할퀸 신체적인 고통보다 제 홀로 세상에 나뒹굴어진 느낌, 어미의 품을 떠나 처음 만나는 낯선 세상에 대한 경계심으로 놈은 제 몸에 날을 세웠다.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봐라.

날 선 놈의 모양새에 물길마저 손을 베기도 했지만 때로는 측은지심으로, 또 때로는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놈의 마음이야 금방이라도 어미를 찾아갈 수 있으련만 어찌된 셈인지 정작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결코 나아갈 수 없는, 놈은 자신의 무력함에 좌절했다. 제 집에 금송아지를 매여 놓은들 무슨 소용일까, 우람했던 어미 품에서 벗어난 놈은 한낱 떨어져나간 돌멩이에 불과했으니.

이후, 놈은 물길에 제 몸을 맡길 줄 알게 됐고, 그때마다 자신의 모양새가 변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은연 중 옆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고, 자신과 닮은 다른 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눈도 생겼다. 세상엔 견뎌내지 못할 고통도, 그리고 이유 없는 고통도 없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흘렀을까. 이제 어미의 품도 아련하다. 피붙이를 만난다 해도 기억조차 할 수 있을까 싶다. 만나고 헤어지는 게 삶의 순리라면,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연이 애틋하다는 것도 이해하게 됐다.

찰랑찰랑, 놈은 이제 어깨를 지나는 물길만으로도 그 세기를 짐작할 수 있으며 세상의 소리에도 익숙해졌다. 이때 쯤 세상의 모든 건 제 몫이 있다는 것도 눈치 챘다.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는 게 세상 인심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물길에 제 몸을 누일 줄도 알았다. 장난기 품은 물길이 간지럼을 태우면 슬쩍 몸을 뒤척이곤 했다. 특별히 어떤 모양을 마음에 둔 건 아니었다. 세상의 삶이 제 의지대로 되는 게 얼마나 있던가. 어쩜 그건 그런 모양을 탐내는 인간들의 눈에서 이름 지어졌을 뿐, 놈은 그저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물개자갈이라니, 그러고 보니 어쩜 놈의 속내는 언젠가 되돌아갈 어미에게 제 삶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미를 찾아갈 수 있는 가장 빠른 형상으로 되살아났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움을 제 몸으로 연기한 놈의 작업에 고개가 숙여진다. 삶이 곧 예술이다.

완연하게 달라지는 딴판의 세상, 물에서 벗어난 그의 몸이 어떤 변신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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