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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경의 북리뷰]“타자와 소통하라, 그것이 부조리한 사회와의 소통 일지라도…”



이효경(UW 한국학도서관 사서)

알베르 카뮈 『이방인』 (민음사, 2011)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살해했다면 이해가 갈까?
 
 
이방인이라 하면 보통 타국에서 온 낯선 사람을 뜻한다. 같은 민족이나 친구, 가까운 가족의 일원을 이방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회와 문화, 생활 방식이 이해되고 공유되기 때문이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사는 사회 내에서 고독한 이방인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뜻하지 않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외로운 존재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방인』의 기본 줄거리는 주인공 뫼르소가 친구와 다투던 아랍 사람을 권총으로 죽이고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이야기이다.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그의 진술이었다. 진술은 사실이었고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물론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사실 뫼르소는 여러 면에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낯선 곳에서 온 사람처럼 그의 생각과 행동은 생경하고 의아하다.

뫼르소의 이방인 같은 모습은 자신의 엄마 장례식에서 보여준 무심한 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엄마의 부고를 듣고 양로원에 가는 길은 멀고 귀찮다. 양로원의 원장은 엄마의 시신을 봉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는데, 뫼르소는 마지막 엄마의 시신을 보기를 거절한다.

엄마의 사망 당시 나이도 정확히 기억에 없다. 무더운 여름날의 장례식이 그저 길고 지루할 뿐이다. 어서 장례식이 끝나고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뫼르소를 지배한다.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에 눈물 흘리지 않아
 

결정적으로 엄마의 장례식에서 뫼르소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을 목격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을 의심하기에 이르고 그를 이방인으로 내모는 절호의 단서로 삼는다.  
 
주인공 뫼르소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이렇게 이방인 같을까? 책을 읽는 독자는 인간 뫼르소를 이해하고자 처음부터 끝까지 텍스트와 씨름하게 된다. 그와 엄마 간의 심리 기저엔 납득할만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정신분석학자의 마음으로 그를 읽어 나가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을 총동원해 봐도 뫼르소라는 인간의 가닥이 여간해서 잡히지 않는다.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될 때쯤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한낱 무의미한 것임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것이 카뮈가 말하려고 하는 부조리(不條理)문학의 핵심일까?
 
카뮈는 이 책에서 뫼르소가 살인에 이르게 된 정신적 질환이라던가 과거의 내적 상처 내지는 말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부재 뭐 이런 것으로 추측해 보려고 하는 나의 섣부른 의도를 여지없이 잘라버린다. 그의 이방인 같은 행동에 어떤 결정적 근거가 될만한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냥 익숙한 나와는 다른 인간이 있을 뿐이다. 뫼르소가 특별히 더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솔직했으며 그 이상을 생각하지도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쯤에서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뫼르소라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그에겐 일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죽음도 그에겐 죽음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다. 연인 마리와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하겠지만, 누구와 결혼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사랑의 확인에 목말라하는 마리에게 이방인 같은 대답만 들려줄 뿐이다. 누군가에게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후 이어서 또다시 네 발을 당긴 것도 그를 재판하는 배심원과 판사 모두에겐 의미가 있는 일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겐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이런 낯선 사고방식에 뫼르소를 이해하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반 독자의 마음은 자꾸만 멀어져 가려 한다.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뒤전인 천성

 
뫼르소는 자신을 나는 원래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라고 해석한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뫼르소를 일관적으로 묘사하는 가장 적절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매우 솔직하고 감정에 즉흥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재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일점일획을 더 보태거나 빼지 않는다.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도 그는 매우 피곤했고 졸렸을 뿐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반응하기엔 그의 육체적 상태와 욕구가 우선이었다. 장례식 바로 다음날 그는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을 즐긴다. 그곳에서 만난 옛 직장 동료였던 마리와 영화를 보고 맘껏 사랑을 나눈다. 육체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자신의 감정을 그 흐름에 맡긴다.
 
타는 듯한 햇볕에 정신을 잃고 긴장된 상태로 손을 거머쥔 것이 주머니 속에 있었던 권총의 방아쇠였던 것도 바로 그런 무심한이유에서였다.
 
뫼르소는 특히 여름의 더위에 약했는데,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도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의 한낮이었다. 그 똑같은 태양이 불 같은 바람을 일으키면 그의 육체는 온전히 지배당한다. 햇볕의 뜨거움과 땀방울이 쏟아져 내리게 되어 정신이 없었을 뿐인데 뫼르소는 어느새 살인자가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에 압도된 육체의 행동이 한 인간의 삶을 지배했다고 뫼르소를 이해해야 할 참이다.
 
그러나 그렇게 뫼르소를 이해하는 것조차 우리에게 또한 낯설다. 뫼르소를 재판했던 배심원들과 판사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살인자로 판정되고 결국 사형에 이른다.
 
집단으로 간주된 상식과 통념이 분명 한 사람의 상황과 개인성을 중요하게 다룰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난다.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 변화가 찾아온다

 
책의 2부는 뫼르소의 사형 선고를 받고 난 후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뫼르소의 변화를 주목해 볼 만하다. 그가 보여주었던 이제까지의 담담하고 무관심하며 초연한 모습과는 달리 부쩍 세상과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사색이 많아짐을 발견한다. 사형 선고가 그를 이제껏 수동적이고 물리적으로 반응했던 인간에서 자신의 생애를 성찰하고 고민하게 하는 인간으로 만든 것일까?  
 
그러나 그러한 성찰도 제 죽음 앞에서는 무엇 하나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엄마의 사랑도 그를 신에게로 구원하려는 사제의 마지막 노력도 뫼르소에겐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럴수록 오직 사람이란 누구나 특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죽음과 씨름하는 뫼르소에게는 더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개인으로서의 특권을 가진 그의 삶이 사형 선고를 강요받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맞물린다. 뫼르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위해 햇빛에 반응하듯 자연 반사적으로 몸부림친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옳을 것이라는 자신에 대한 확신,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내 인생에 대한 확신과 앞으로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을 선포한다.
 
그런데 그의 이런 단호한 몸부림과 공허한 외침 뒤에 의아하게도 엄마에 대한 생각이 그를 차츰 꿈틀거리게 한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죽은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처럼 죽음 앞에서 다시 살아 볼 생각을 꿈꾼다. 엄마에 대한 이방인 같은 태도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문제의 본연으로 돌아가 죽음을 되돌려 보는 상상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뫼르소는 처음으로 그에게 무심했던 세계에 마음을 열게 된다. 그 순간, 그는 행복함을 맛본다.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한 가닥 희망도 본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비웃음 속엔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의 절규가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철저한 이방인으로 남기를 각오한다. 죽음을 딛고 그의 삶을 짓밟은 사회의 이방인들을 향해 마지막 비소를 날리면서……. 그 비웃음 속엔 그의 마지막 절규, 살아 보지 못했던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이 처절하게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마지막 소원은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기를 바란다.”

그는 말한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엄마의 존재도 그의 삶 속에 들어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갑자기 닥친 죽음의 선고 앞에는, 자신의 외로웠던 삶을 정리하며 그가 살아온 부조리한 전 생애에 결말을 완성하는 것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방인이란 사회가 이 세상서 내친 개인의 인간성 아닐까
 
이방인이란 사회가 이 세상에서 내쳐 버린 개인의 인간성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일반이라는 틀에 묻혀 개인은 사라지고 설 틈이 없다. 인간이 만든 사회라는 구성은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해 보이는 것으로의 근접일 뿐이지 완벽한 공의와 정의를 추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믿도록 우리를 강요할 뿐이다.
 
재판이라는 가장 공정해야 할 법의 제도조차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을 이방인 뫼르소의 경우에서 그 일면을 본다. 개개인의 특성은 단체와 집단의 판단에 소멸하여야 할 대상으로 취급할 수 밖에 없는 이런 불완전한 사회 속에서 온전함을 느끼며 사는 인간이 되려 진정한 이방인 같은 존재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 각자의 행성을 돌고 있는 외로운 이방인이다. 그 외로운 길에 눈을 들어 또 다른 이방인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죽음에 임박해서야 소통을 맞이하지 마시길…”

 
죽음 앞의 뫼르소에겐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우리에게 그는 타자와의 찬란한 소통을 지금 시작하라고 말한다. 타자와의 소통은 결국 부조리한 사회와의 소통의 시작이고, 더 나아가 상식과 통념을 넘어서는 인간성의 존중이자 타자와 나의 진정한 만남이다. 다만 그 소통이 죽음이 임박해서야 맞이하는 것이 아니길 뫼르소는 우리에게 간절히 당부한다.
 
그 길만이 내가 이방인이 되지 않고 남을 이방인 취급하지 않는 가장 기본적 삶의 방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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