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한칠] 가을을 찍다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가을을 찍다  

 

‘내가 만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대의 우주에 햇빛이 될래요.’

‘97년 그래미상을 휩쓴 에릭 클랩턴 노래(Change the World)다. 세상이 쉽게 바뀌겠냐마는 내가  바뀐 건 맞다. 스쳐 버린 것들이 새삼 보인다. 삼라만상이 곰비임비 내게 다가온다. 그 모습들을 재삼재사 들추어 내어 나만의 뷰파인더에 자꾸 담는다. 사진으로나마, 에릭 클랩턴의 노랫말처럼 나도 누리에 빛이 되고 싶다.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곧게 뻗은 기상이 올차다. 인고의 세월을 온몸에 새긴 외피, 굵은 주름살이 고스란하다. 나는 활처럼 휘어져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고목의 민낯 주름을 아로새긴다.

행사에서 사진을 즐겨 찍는다. 순수한 봉사다. 인물사진을 찍을 때, 나는 표준 단렌즈를 주로 사용한다. 그 렌즈는 대상을 꾸밈없이 표현해준다. 한껏 모양낸 이들이 흘리는 순간을 슬며시 붙든다. 이쪽 보세요. 없는 재롱도 피우며 요것조것 주문한다.‘지금 모습이 가장 젊고 아름답습니다.’내가 중년의 끄트머리에 서있어서일까, 나이든 분들 사진 찍을 때면 괜히 신이 난다. 꾸밈없는 순수한 모습을 붙잡는다.

귀한 수석이 내게 왔다. 어린이 키만 한 산수석(山水石)을 정성스레 가공한 미석이었다.   천연석을 좋아하는 나도 반할 정도로 섬세했다. 그는 한동안 거실의 명당을 차지했다. 얼마 뒤, 나는 그 수석을 눈독 들이던 친구에게 미련없이 넘겨주었다. 사진을 찍다 보면, 자연 그대로에 눈길이 끌린다. 

세상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다. 같은 사람과 사물을 대하면서도 내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일 때가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찍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대상을 보느냐에 따라 사진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본인 셀 폰 홈 화면에 띄워 놓은 친구들이 있다.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영정사진으로 딱 어울린다며 간직한 어르신들도 있다. 메탈 프린트를 만든다며 원본 사이즈를 청하기도 했다. 실물보다 잘 나왔다며 말로 건네받은 선물이 수두룩하다. 요런 맛에 나는 야외나 실내를 가리지 않고 발품을 팔고 있나 보다.   

공원에서 노부부 사진을 촬영했다. 웃음기 없는 두 분은 심각한 표정으로 떨어져 섰다. 내 주문대로 남편이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런 포즈는 처음이라나. 쑥스러워하면서 활짝 웃었다. 그 순간을 포착, 찰칵. 사진을 보고 그의 아내가 내게 연락했다. ‘크게 빼고 싶은데요…’. 사진을 큰 사이즈 캔버스로 만들어 거실에 걸었단다. 그 뒤, 입꼬리가 확실하게 올라간 그들을 만날 때면 나도 따라 웃는다.

꼬네꼬네. 여섯 달 된 아기가 아빠의 오른손 바닥에 두 발을 딛고 곧게 섰다. 앙증맞은 주먹을 꼭 쥔 채 까르르 웃는다. 손바닥 위 아기를 조심스레 어르고 있는 젊은 아빠가 환하게 웃음 짓는다. 그의 그림자가 머금은 옆얼굴 미소가 대박이다. 아기와 아빠 그리고 그림자, 세 사람의 행복을 찍었다.

우리 집 근처, 가을이면 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삼각대를 놓고 해마다 촬영했다. 유난히 붉은 단풍 사진들이 주변에 화제가 되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좋아하는 지인들이 늘어났다. ‘마주 보세요.’  매년 시월 마지막 주말, 원하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촬영을 끝낸 뒤, 부근 맥주 공장 카페에서 들이키는 흑맥주 맛은 꿀맛이었다. 사진 찍은 죄로 맥주 값은 내 보질 못했다. 그렇게 더불어 만추를 즐긴 지 강산이 바뀌었다.

매년 시월에 촬영하던 단풍 사진을 올해는 시애틀이 아닌 동부에서 찍었다. 뉴햄프셔주에 있는 화이트 마운틴은 레이니어산만큼이나 유명하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워싱턴 마운틴을 기차 대신 차로 한 바퀴 돌았다. 정상에서 바라본 사각 팔방은 다채로운 양탄자였다. 메인, 버몬트, 뉴햄프셔주의 가을 단풍을 차곡차곡 주워 담았다.

나는 피사체에서 그들만의 개성을 찾는다.  관심 기울이는 대상에는 제풀로 눈이 간다. 내가 건진 아름드리 고목과 가을 단풍 사진들도 그랬다. 그 고목(古木)의 당당한 기백과 활활 타오르는 단풍의 열정을 닮고 싶어서였을까. 내가, 내 안에 깊이 숨겨진 내 맘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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