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정동순] 가을 음악회의 추억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가을 음악회의 추억


가을이면 기다리는 음악회가 있다. 바쁘게만 흘러가는 일상에 쉼표 하나 콕 찍는 날이다. 자주 외출을 하지 않는 친구를 꼬드겨 부부 동반으로 시애틀 다운타운에 있는 베냐로야 홀에서 만났다. 마침 자리가 무대에서 몇 줄 떨어진 정중앙 자리로 연주자와 눈높이가 같은 명당이었다. 더구나 워싱턴주 한인음악협회의 40주년 기념 음악회로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특별출연하는 날이니 무지 운이 좋았다.

여러 순서가 끝나고, 드디어 인어공주 같은 분홍색 어깨끈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풍성하게 부풀린 검푸른 치맛자락엔 초록색 무늬의 장식이 밤하늘 별 같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나비 같기도 했다.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의 모든 감각세포가 일제히 무대를 향해 발진했다. 서혜경이란 이름은 무수히 들었지만, 각별히 친근감을 느낀 계기는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였다. 

서혜경은 그 드라마에서 목발을 짚고 오디션을 보러 온다. 동네 피아노학원을 하는 서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피아니스트이자 교수란 신분을 숨기고 오디션에 참가하는 강 마에의 친구 서혜경을 동시에 연기했다. 짧은 출연이지만 그의 수수하면서도 열정적인 피아노 연주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직접 마주한 서혜경은 뛰어난 연주자이면서 스토리텔러이기도 했다. 각 곡을 직접 소개하며 작곡 배경을 설명하고 피아노 선율로 사랑이나 질투, 초조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짝살짝 들려주기도 했다. 가을 나무처럼 원숙함이 무르익은 연주자는 페이지터너도 악보도 없이 모든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연주를 즐기면서 청중을 편안하게 자신의 연주 안으로 몰입하게 하는 강력한 자석 같은 힘이 있었다. 곡을 완벽하게 연주를 해야 한다는 비장함이 저절로 묻어나는 젊은 연주자의 긴장감은 없었다.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고 느끼는 환희가 베냐로야 홀에 가득했다. 대가란 이런 때 쓰는 호칭인가 보다.  

한편, 달리는 말 근육 같은 그녀의 팔뚝은 연주 내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와 그녀의 무대가 가깝기도 하고, 타이트한 어깨끈 드레스를 입었기에 건반 위에서 춤추는 그녀의 모든 손동작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마른 듯한 상체, 군살 없는 팔에는 젊은 몸짱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팔근육들이 팔딱였다. 매일 수 시간씩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당연할지라도 나는 그녀의 팔뚝에서 그녀의 시간을 읽었다. 곡을 해석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을 시간, 시간의 진심이란 말은 이런 데 쓰는 것이 옳지 싶었다. 

밤의 서정을 표현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할 차례였다.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졌다. 객석에서 아! 하는 탄성이 쏟아졌다. 조명에 익숙했던 눈에 어둠은 더욱더 짙게 내려왔다.  박수 그리고 침묵. 침 삼키는 소리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녹턴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은 사라지고 오직 귀에 들리는 소리에만 몰입했다. 작은 무대가 둥둥 떠올라 한 척의 배로 까만 밤하늘로 떠올라 거대한 은하를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 포근한 깃털에 싸여 음을 타고 날아가는,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처럼 총총한 별빛 가득한 은하로 소리의 파동과 함께 내 영혼도 무한히 확장되어 어디론가 함께 가고 있었다. 

모든 연주가 끝났다. 일류 음악평론가의 말을 빌려올 필요도 없었다. 과연 이렇게 아름다운 녹턴을 언제 또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서혜경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었다.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번역자가 자신도 역시 창작자라고 하는 것처럼 그녀가 연주한 곡들은 더 이상 작곡자의 곡이 아니라 그녀만의 방법으로 창조해낸 또 다른 곡이라고 믿게 되었다. 

서혜경은 그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실내 조명을 끄고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혜경을 콩쿠르에 내 보내지 않았다. 한석봉을 연상시키는 엄마의 훈련은 엄하기만 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 곡을 이렇게 연주하기까지 노력을 생각했다. 이 음악을 작곡했던 날의 쇼팽의 영혼과 교감하듯 마침내 곡이 자신에게 딱 달러 붙게 되었음을 인지했을 때 느꼈을 소녀 혜경의 환희를 상상해 보았다. 거장이 되기까지 고된 훈련을 견뎌낸 어린 혜경을 안아주고 싶었다.     

가을이 오면 그 시간의 여운이 내 맘에 가득 차올라 그날을 추억한다. 눈을 감고 다시 느껴본다. 연주 내내 강력하게 내 시선을 끌었던 그녀의 팔뚝 근육의 움직임, 모든 조명을 끄고 어둠 속에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던 섬세한 녹턴의 시간이 또 내게 속삭인다. 

너는 더 나은 너를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하여 무엇을 수련하고 있는가. 네가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몰라도 그 길에서 느끼고 깨닫고 배우는 것들을 그날처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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