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대로] 다방

이대로(서북미문인협회 회원)

 

다방


한동안 지금의 카페 대신 다방이 많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기 전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의 시기에는 서울에도 다방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방은 큰 사업이었고 주 상품은 차와 커피, 그리고 우유였다. 커피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맥스웰’이고 맥스웰은 커피의 대명사였다. 지금과 같이 다양한 종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커피는 한 가지였고 맛도 그냥 씁쓸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다방에서 커피 마시는 것이 신세대의 낭만이고 사교 방식이 되어 있었다. 제한된 재료에서 더 많은 커피를 뽑아 내기 위해 담배꽁초를 사용하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사건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생산량이 아주 적었던 우유는 다방에서 파는 고급 음료로 취급되었다. 날계란 하나 깨 넣은 뜨뜻한 우유 한 컵은 최고 단골 만의 특별 메뉴였다. 

땡전 한 푼 없는 청소년들이 겉 폼 잡느라고 다방엘 가보긴 하지만, 제일 값싼 엽차 한 잔 시켜 놓고 시간 보내다가 눈총받기가 일쑤였다. 

지금도 관광객이 많은 시골 읍내에는 가끔 유적처럼 남아있는 다방 간판을 볼 수 있다. 옛 향수를 달래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한다. 

10여 년 전에 한국에 갔을 때 고향도 찾아봤다. 추억이 박혀 있는 초등학교도 읍내에 있는 중학교도 둘러보았다. 경찰서 앞 로터리에서 사방을 둘러보면서 아득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길은 더 넓어지지 않았고 한가운데 분수대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주위 모습은 몰라보게 많이 변해 있었다. 우체국도 사진관도 중국음식점도 찐빵 가게도 볼 수가 없었다. 

달라진 모습에 불평도 못 한 채 계속해서 둘러보다가 아직도 그 자리에 걸려있는 다방 간판을 보았다. 장터로 향하는 길모퉁이에 길목이 좋은 장소다. 왠지 모르게 스며드는 짜릿한 정을 느끼며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층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서 오시라는 종업원의 인사말처럼 정겨웠다. 

공간도 널찍하고 손님 좌석이나 카운터도 말쑥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식탁이 눈을 자극했다. 다른 모습은 많이 바뀌었으나 그 테이블만은 반세기 전의 그 자리인 것이 틀림없었다. 

엄마 따라 장에 가면 장터 국수를 사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뚜렷하다. 자장면은 비싸서 못 먹었다. 그때 중국 자장면 가게가 이 다방 아래층에 있었다. 

서울에서 주경야독으로 학교에 다녔다. 고향을 떠나 성공은 못했지만 내가 번 돈으로 어머니에게 커피를 사드렸던 자리다. 어머니는 맛을 모르겠다면서도 자장면 입가심으론 괜찮은 것 같다고 에둘러 좋게 평했다. 창밖 멀리 보이는 이웃집 장독대도 그대로였다. 

한동안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벽 한 편에 커다란 안내문 같은 것이 있어 다가가 보았다. 

영업은 하지 않으나 고향을 찾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반가움의 인사라며 자동판매기의 커피와 고로쇠 약수, 그리고 산수유를 무료로 그냥 즐기라는 내용이었다. 고향의 짙은 인정이 시큰하도록 코끝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고로쇠 약수 한 컵을 들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어머니의 체온이 전해왔다. 

수십 년을 우려낸 고향의 정을 가슴에 품고 나오면서 간판 밑에서 인증샷도 찍었다.

나이가 더 해지면서 건망증도 심해지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느낀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별 가치 없는 일이라도 오래된 일일수록, 마치 단단한 돌에 깊이 새겨 놓은 것처럼 더 생생하게 살아있음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고향의 추억이 바로 그 증거인가 보다. 

그동안 세상을 살면서 겪었던 온갖 고난과 풍파에도 바래지 않고 더 뚜렷하게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때 그 고향 다방이 눈에 선하다. 고향은 어머니의 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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