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공순해] 한숨으로 굳는 시간의 화석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한숨으로 굳는 시간의 화석


다녀오겠습니다.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큰놈은 아침마다 인사 꾸벅하고 컴퓨터 앞에 가 앉곤 했다. 9년 동안 입에 붙어온 말이기에 습관이 됐나 보다.

습관이란 행위가 반복되며 길들여진 결과다. 애들 아비, 아들은 초등생 때부터 오후 3시면 전화했다. 학교 잘 다녀왔다는 보고를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에게 빼먹지 않고 한 것이다. 그 습관은 초중고로 이어졌다. 대학에 가선 토요일 오후 9시면 집에 전화했다. 토요일의 데이트에만 신경 쓰던 친구들이 넌 아직도 집에 전화하냐, 놀렸다 한다. 심지어 일본에 거주할 때도 토요일 오후 9시면 어김없이 전화했다. 여기 돌아와서도 매일 오후 3시에 전화했다. 퇴근한다고, 집에 곧 도착할 거라고. 그 습관이 멈춘 건 재택근무 탓이다. 회사 근무로 돌아가면 아마도 그 습관이 되풀이되지 않을지. 그래서 요즘도 나는 3시 무렵 전화벨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아들을 떠올린다. 파블로프의 훈련 이론이 여지없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손주와 아들의 이런 습관은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다음의 내 습관은 확실히 나쁜 습관에 속할 것이다. 손대 먹어야 하는 음식과 껍질 많은 여름 과일을 되도록 피하는 버릇. 소풍을 가면, 둘러앉아 먹는 점심시간이 소풍의 정점이다. 한데 어느 소풍날 동료가 통닭을 뜯어내 밥 위에 척 올려놓았다. 가만 보아하니 손으로 먹어야 하는 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그렇게 가려 먹으니 맨날 비실거리지. 뜯어 줄 테니 자, 먹어 봐. 통닭이며 갈비며 전투적(?)으로 뜯는 동료들을 피해 자신의 그릇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사람이 내 엄만가, 의식 못 한 내 습관을 지적해내다니… 

그러고 보니 후식으로 수박 같은 걸 쥐여 줘도 손에 물기 젓는다며 사양했다. 젓가락 등, 도구를 사용해 먹는 음식 외, 손으로 집어 먹는 음식을 거의 먹어 본 적이 없다. 이런 버릇은 장용학의 어느 소설을 읽고 난 후 잠재됐던 게 아닐지. 주인공이 자신과 어머니를 비인화(非人化)시킨 외숙댁을 찾아가 그들이 먹고 있던 과일의 벗겨낸 껍질들, 돼지 뜨물 화한 그것을 다 먹도록 협박해 응징하던 장면이었다. 인간의 비인화가 순식간임을 갈파하던 장면. 10대 후반의 어린 영혼에게 충분히 충격적이었던 장면이었다. 인간과 비인(非人)의 차이는 뭘까. 

그는 <역성서설(易姓序說)>에서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인간이란 하나의 에피소드, 잠시 시간에 이기어진 흙덩이. 이 시니칼한 정의에 정신이 휘청댔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기에 칼날에 부욱 베인 것만 같았다. 손대 먹는 음식을 피한 건 아마 그 후였을 것이다. 꼭 먹어야 할 경우 나는 쌈도 젓가락으로 먹는다. 옆에서 보기에 얼마나 가소로울까. 독서의 유익이 있다면 이건 독서의 폐해다.

한데 미국에 와 보니 손으로 먹는 게 많다. 아예 음식의 한 분야다. 성대한 파티를 열어도 대접하는 음식은 대부분 핑거푸드. 땡스기빙 파티에서 터키 구이를 오며 가며 손으로 집어 먹고, 손가락에 묻은 걸 쪽쪽 빨아 먹는 모습이라니. 이런 사람들 속에서 몇십 년 살았으니 습관도 어지간히 희석됐을 법한데 그래도 여전히 식탁에 앉으면 두리번거리며 젓가락부터 찾게 된다. 포크로 식사하는 자리가 나는 아직도 불편하다. 식당에 가서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으면 무척 행복한 기분이 든다. 

습관이 뼈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탓일 것이다. 시간을 통과하며 온갖 부침 속에 작심삼일의 한숨으로 굳어지는 습관. 그러기에 어쩌면 습관은 공룡 뼈처럼 굳어진 시간의 화석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의 뼈대, 또는 근육 같은 것이 아닐지. 근육을 움직여야 몸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정신 활동의 상당 부분이 습관에 의해 이루어지니까. 그리고 좋든 나쁘든 일단 굳어진  습관은 바꾸기 쉽지 않다. 의지력을 발휘해 고치려 해도 막상 닥치면 여지없이 습관의 힘이 이긴다. 

이제 아이들은 표면상 학교로 돌아갔다. 그 사이 아이들은 한 학년씩 진급해, 줄줄이 성장을 이루었다. 우리 모두 어려웠지만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바야흐로 비대면 시대도 대면 시대로 돌아갈 조짐이 조금씩 보인다. 숨죽여 지냈던 지난 두 해 동안 어떤 습관들이 생겼을까 궁금하다. 결코 짧지 않았던 시간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시간의 흔적처럼 습관이 형성됐을 것이다. 부디 나쁜 습관이 아닌 좋은 습관만 드러나게 되길 바란다. 습관이 영성이라는데, 나쁜 습관으로 해서 한숨 쉬는 일만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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