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안문자] 지금은 공사 중
- 21-10-17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지금은 공사 중
티 없이 맑고 투명한 하늘이다. 힘겨웠던 계절의 고통을 함께 겪으며 제몫을 다한 나무들은 시침 떼고 다가온 계절을 위해 단장이 한창이다. 정원의 꽃들과 텃밭의 푸성귀들도 지친 몸으로 씨를 품는다. ‘가을의 바람소리를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겨울을 걱정하는 외로운 나그네라’는 시가 떠오른다. 세월의 온갖 아픔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가을은 어떤 모습의 겨울을 우리 곁에 오게 할까?
아, 가을! 마스크의 물결을 넘어 봄도 가고 여름도 뒷걸음쳤다. 코로나의 기승이 한풀 꺾이는가 했더니 이름을 바꾼 후 다시 인간을 위협한다. 환경 파괴의 죗값을 치루 듯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해일, 지진, 폭염, 게다가 전쟁의 끔직한 소식은 이어진다.
끝은 언제일까? 삶이 불안하다. 누군가 말했다. 종말의 징조라고. 사람이 사는 곳 마다 들리는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듣고 계시는지? 왜 당신이 지으신 세상이 망가져 가는데 못들은 척, 못 본 척 하실까? 아니면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는 오만한 인간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리시는가? 야속하다 못해 따지고 싶다. 사랑의 하나님 아니신가요?
동부에 사는 딸의 전화다. 앞집에서 사과밭에서 따온 예쁜 사과를 한소쿠리 갖고 왔단다. ‘아, 시애틀의 아름다운 가을이 그리워, 엄마, 여름에 허리케인 아이다가 몰려와 무섭게 비가 쏟아질 땐 세상이 끝날 것 같았어. 노아의 홍수 때가 그랬을까? 그때 갑자기 생각났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뜻밖의 마지막 말에 하하 웃음이 터졌다. ‘그 아줌마는 예수님께 왜 구름타고 안 오시냐고,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를 더 많이 부르짖겠지?’ 아이와 통화를 끝내고 마음이 무거웠다.
이민 오기 전 10여 년 넘게 도우미 아줌마가 있었다. ‘믿사오니 아줌마’로 통했던 그녀는 걱정거리나 마땅찮은 상황이 벌어지면 하루에도 몇 번 씩 손을 하늘로 뻗으며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를 외치곤 했다. 딸은 아기 때부터 그 말만 나오면 깔깔대더니 언제부터인가 따라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아이들의 약을 지어오면 우리가 출근한 후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안수기도를 했다. 아이들은 병원에 가기보다 아줌마의 기도를 더 좋아했다. 곧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실 텐데 착하게 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어 그녀의 말을 부모의 말보다 더 잘 들었다. 꼬맹이가 아줌마의 안수기도나 주여! 하며 부르짖음 흉내를 자주 냈다. 우린 아이들이 자유로운 삶 속에서 신앙을 몸에 익히기를 원했으나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서 차마 ’그런 거 하면 안 돼.‘ 라고 못했다. 속리산 여행 중 사찰을 구경하러 들어가는데 아이들이 안 된다고 소리치며 울었다. 아줌마의 다른 종교 불신 교육 때문이었다. 아줌마는 내게도 성경만 보란다. 그녀는 이 험악해진 세태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나님의 침묵’이란 글을 읽었다. 저자 목사님은 관계의 단절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건 이미 관계가 단절되었기에 응답이 없고 간절히 울부짖어도 침묵하신다고. 정말일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참된 의미, 침묵을 견디는 힘, 기다릴 줄 아는 지혜...나는 이런 말을 기대했다. 이 긴장의 연속이 언제 끝날 지 안타깝게 기다리는 신자들은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의 고통을 바라보며 하나님도 아파하신다. 잘못을 저질러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의 상한 마음과 몸을 치유해 주신다고 믿는다. 침묵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상대를 생각하는 시간일 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일까?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 벽에서 발견한 낙서가 있다.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죽음 앞에서 그는 하나님의 침묵에 절망하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주관자는 무너져가는 사회정의, 질서, 망가뜨린 자연, 심지어 인간의 타락상까지 고치시려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본 것이다.
하나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간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무너진 곳을 재건하는 공사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사 중인 하나님은 침묵 하시는 듯, 하지만 믿음은 그 침묵 속에 미래가 담겨있음을 예감한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마음의 고백이리라.
가을이 바람을 타고 속삭인다. 사각사각 보이지 않는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가을을 만든다. 성숙의 계절, 가을이 내 안에서도 성큼 자란다. 깊어진 눈, 밝아진 귀를 통해 하나남의 사랑을 느낀다. ‘괜찮아, 내가 다 알고 있어’. 아, 내 생명의 주인이 따뜻한 손길로 근심하는 내 등을 토닥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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