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메르켈…16년 '엄마 리더십'은 스트롱맨들보다 강했다
- 21-09-25
통일 전 정치에 입문해 통일 후 첫 동독, 물리학자 출신 여성 총리가 된 메르켈은, 이번에 퇴임하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 사상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총리가 된다. 아울러 동·서독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전 총리와 함께 '최장수 총리' 타이틀도 얻는다.
독일 사회의 현재 화두가 '변화'이긴 하지만, 2005년부터 4선을 통해 16년간 집권한 메르켈 총리는 75%의 높은 지지율로 임기를 마무리할 전망이다.
전 유럽과 국제사회가 존경과 아쉬움으로 메르켈 총리와의 작별을 준비하는 가운데, 24일(현지시간) AFP 통신은 이번 총선 이후 정계 은퇴를 앞둔 메르켈 총리의 지난 삶을 조명했다.
◇어부들 표심 사로잡은 동독 여성, 총리 되기까지
베를린 장벽 붕괴 이듬해인 1991년 당시 36세의 메르켈은 독일 북부 루겐섬에 있는 한 어부들의 오두막에 발을 들여놓았다.
흰 셔츠에 긴 데님 스커트를 입고 밤색 가디건을 걸친 모습으로 메르켈은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어부 5명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의 어부는 훗날 "메르켈이 우리를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구동독 지역 선거구(Stralsund, Ruegen, Grimmen) 연방의회 의원으로 출마한 메르켈에게 표를 던졌다.
동서독 통일 전 정계에 입문한 메르켈은 그렇게 첫 선출직 정치인이 됐고, 이후 총리가 되는 본격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메르켈과 대화 나눈 어부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2005년 총선에서 보수 기독민주(CDU)·기독사회(CSU) 연합이 근소차로 승리하며 메르켈이 그해 11월 독일의 첫 여성 총리로 취임하게 될 것을.
◇실용주의…전 정부 정책 이어받기
2000년대 초반까지 독일은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은 18% 성장에 그쳤다. 영국(35%)과 네덜란드(34%)의 절반 수준이었다.
저성장으로 일자리 창출도 힘들었다. 독일의 실업률은 1990년대에 증가했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서독은 9%, 동독은 18%를 넘었다. 특히 1년 이상의 실업자들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장기실업이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국가재정도 취약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좌파 성향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이끌던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은 재집권 직후인 2003년 3월 개혁 청사진인 '어젠다 2010'을 발표했다.
독일 사회와 경제 분야에서 고비용 구조와 비능률을 개혁하기 위해 도입됐던 '어젠다 2010'은 복지 혜택을 줄이고 해고 규정을 완화하도록 한 하르츠 법안이 핵심 요소였다.
각종 복지 혜택을 줄이는 개혁 방향은 국민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슈뢰더 총리는 차기 총선에서 패배를 감수하고서라도 개혁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2003년 3월 의회에서 의원들에게 '어젠다 2010'을 소개하면서 "미래에는 어느 누구도 사회의 희생 위에서 쉬도록 해서 안된다"며 "합당한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제재를 받아야 한다"며 개혁에 강한 의욕을 나타냈다.
슈뢰더 총리는 결국, 개혁에 대한 저항에 부딪혀 2005년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중도우파 성향의 후임 앙겔라 메르켈 정부는 '어젠다 2010'을 외면하지 않고 바통을 이어갔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첫 의회 연설에서 "'어젠다 2010'으로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문을 열게 한 전임 슈뢰더 총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하르츠 개혁'은 수년간 독일 경제 회복의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열 두 번째 플레이어
메르켈 총리가 취임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독일 월드컵이 열렸다.
독일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3위에 그쳤지만, 대표팀이 경기하는 동안 국기를 흔들며 열광하던 메르켈의 모습이 새삼 회자됐다.
타임지는 메르켈의 모습을 '독일을 응원하는 여성'으로 소개했고, 독일 언론에서는 골이 들어간 뒤 기뻐하던 모습을 두고 "(남성 대표팀)팀내 12번째 남성의 이름은 앙겔라"라고 칭하기도 했다.
시사주간지 디차이트는 심지어 메르켈과 미드필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사이에 오갔을 법한 러브레터를 싣기도 했다. '친애하는 바스티'에게로 시작해 '너의 앙게'로 끝맺는 패러디 형식의 러브레터는 총리 메르켈을 한층 친근하게 만들었다.
스트라이커 루카스 포돌스키는 2014년 트위터를 통해 브라질 월드컵 당시 독일 개막전에 메르켈 총리가 참석한 게 '무티베이션(Muttivaton)'이 됐다고 전하기도 했다. 무티(Mutti·엄마)는 메르켈의 별명으로, '동기(motivation)'라는 단어를 재미있게 차용한 것이다.
메르켈의 적극적인 응원 덕분인지 독일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메르켈 총리가 관중석을 지키지 못한 올해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 2020'에서 독일은 8강전에서 탈락하며 사상 최저 성적을 기록했다.
◇유럽 위기에 더 빛난 통합과 안정의 리더십
2009년 말 유럽 재정 위기 당시 메르켈 총리는 악역을 자처했다.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해주는 대신 긴축 개혁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리스가 2015년 경제 붕괴 위기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그리스인들은 메르켈 사진에 히틀러의 콧수염을 그린 포스터를 들고 거리 행진을 하기도 했다.
아직 그리스와 스페인 등에서는 메르켈에 대해 그때의 앙금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유럽 재정위기 국면에서 메르켈 총리가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회원국의 합의를 이끌며 위기 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해온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유로본드(유로존 공동 채권) 발행을 강력히 반대하던 메르켈의 강철같은 마음도 지난해 유럽과 세계 경제를 강타한 코로나 사태 앞에선 별수없이 녹아내렸다.
메르켈 총리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유럽연합(EU) 회복기금 8000억 유로를 조성하는 '통 큰 결단'에 합의했고, EU집행위원회는 27개 회원국을 대표해 본드를 발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다"(wir schaffen Das)
2015년 대규모 난민 수용 결정은 메르켈 총리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혼란으로 130만여 명의 난민이 유럽으로 몰려들자 독일은 메르켈 총리의 강력한 정책으로 그 중 36.6%인 47만6000명을 대거 수용했다. 유럽 내 최대 규모다.
이후 3년에 걸쳐 140만여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기독사회당(CSU)과의 연합이 깨질 위기까지 갔지만 메르켈 총리는 "우리는 할 수 있다"(wir schaffen Das)는 명언을 남기며 유권자를 설득했다.
그러나 이민자 수용 결정이 결과적으로 메르켈 총리의 중대한 과오가 됐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2017년 총선에서 이민자 수용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대중의 분노를 이용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최대 야당으로 부상한 건 독일인들에게 큰 상처가 됐다.
아울러 대규모 난민 유입은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 솅겐조약으로 묶인 EU 국가들 사이에서 반발을 촉진했고, 옛 소련 소속 동유럽 국가들은 단호히 반대하며 대립하기도 했다.
◇트럼프 시대엔 자유세계 수호자로
메르켈 총리는 특히 20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자유 세계 지도자 역할을 맡는 것처럼 보였다고 AFP는 관측했다.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민주적 가치에 기반할 때만 협력을 제공했고, 독일이 미국에 이같이 양보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4년간의 불편한 유대가 시작됐고,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이 신경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모습과 관련, CNN 인터뷰에서 "우리는 정말로 이슈 관련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견해가 뚜렷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우리는 공통점을 찾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계속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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