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왜 책은 쉽게 버릴 수 없는가
- 21-09-06
문해성 수필가
왜 책은 쉽게 버릴 수 없는가
찰깍!
카메라 앞에서 딸기가 가득 담긴 상자를 안고 모든 것을 가진 듯 폼을 잡아본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딸기는 더 싱싱해 보인다. 순간, 수확한 농산물을 안고 농부가 환한 미소를 짓는 포스터가 떠오른다. 나도 그런 표정을 짓고 싶다.
시애틀에 살면서 여름보다 더 기다려지는 계절이 있을까. 맑은 날씨와 늦게까지 떠 있는 해가 야외활동을 부추긴다. 하이킹, 조개 캐기, 낚시, BBQ파티 등등. 그중에 U픽업 농장에 가서 과일이나 채소를 수확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유월 중순쯤부터 딸기를 시작으로 체리, 블루베리, 상추, 고추, 사과까지 바쁘게 농장을 들락거린다. 직접 딴 과일을 입에 넣으면 마트에서 산 것과 어찌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아삭한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한입 물면 여름을 온통 삼키는 듯한 그 맛을 말이다.
다 키워놓은 농산물을 수확해 오면서 농부가 된 듯한 착각을 하지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농부는 자식 기르듯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짓는다. 거기에 적당한 비와 햇볕의 조화가 없으면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봤을 것이다. 구름의 모양과 바람의 방향을 보고 일기를 예측하기까지 농부는 얼마나 많은 열정을 흙에 쏟았을까. 딸기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이유다.
요즘에는 먹고 싶은 채소와 과일을 어느 때나 쉽게 구할 수 있다. 건강을 챙긴다며 장바구니에 제일 많이 담는 것이 신선한 과일과 채소류이다. 그런데도 우리 집 냉장고 안에서 시들거나 상해 가장 많이 버려져 나가는 것도 채소와 과일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따온 과일이나 채소를 버리는 일은 별로 없다.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
책상 앞에 앉자 가득 쌓인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곧 읽어야지 하면서 책장에 꽂지도 않고 쌓아둔 정기구독 문학지며 어렵게 구한 책, 소속 단체에서 받은 책, 한국에서 배달 된 책들이다. 오늘따라 나를 바라보는 책들의 시선이 따갑다. 이러고도 정말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내 책장에는 한글책이 없었다. 한국어로 된 책이 생기면 꼼꼼하게 몇 번을 읽었다. 한국에 나갈 때면 하루 이틀은 꼭 교보문고에 가는 일정을 잡았다. 몇 년 사이 책장에는 한글책이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은 점점 많아지지만 정작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진지하게 다 읽지 못한다. 돋보기를 써야 할 때쯤에는 손에서 거의 책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사 모았다.
마트에 가면 먹거리가 넘쳐나는 것처럼 세상에는 매일 새 책이 쏟아져 나온다. 책을 내는 일이 예전과는 달리 어렵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책 중에 자신에게 꼭 필요한 책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책에 대한 리뷰를 해주는 책과 방송도 많다. 가히 출판물 춘추전국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이 짐이라고 했던 노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젊은 날에는 책만 있으면 더 부러울 게 없었는데 노년에 와서는 책 때문에 편하게 살 공간을 잃어간다고 했다. 학교 도서관에 기증이라도 하고 싶지만 받아주는 곳을 찾는 일이 여의찮다고. 대학도서관마다 포화 상태라 책 기증을 받아 보관할 공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 꺼린다고 했다. 당시 책을 많이 읽고 싶었던 늦깎이 유학생으로서는 노교수의 고민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책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국제 이사 때는 중요한 것이 아니면 버리자고 맘먹었다. 옷가지나 살림살이는 쉽게 버리면서도 책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왜 책은 쉽게 버릴 수 없을까. 책이 마치 양식처럼 소중하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렇다면 필요한 양식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냉장고 안에 음식이 가득 들어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어쩌면 죽을 때까지 책을 버리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많은 책이 세상에 나온다 해도 그것이 나오기까지 글쓴이의 진통을 무시할 수 없다. 짧은 글 몇 자 쓰기도 어디 쉬운 일이던가.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쏟은 작가의 노력은 한 톨의 씨를 싹틔우기 위한 농부의 노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살펴본다. 수많은 책 중에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만난 책들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마음으로 책상 위에 쌓인 책부터 읽어야겠다.
딸기가 유난히 달다. 싱싱한 딸기를 맛있게 먹는 것으로 농부에게 감사함을 대신 전한다. 올해도 직접 딴 과일 상자를 안고 행복한 농부처럼 활짝 웃는 사진 한 장을 남긴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2박3일 캠핑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대한산악회 1일 토요산행
- <속보>아동성폭행 타코마 한인군인, 택시기사 살해혐의로도 기소돼
- 600명 ‘코리아 나이트’서 스트레스 확 날렸다(+영상,화보)
- K-SCAN 한인상공인 길잡이 역할 돋보인다
- [화보] 코리아나이트 신나고 재미있었다
- 벨뷰통합한국학교 전통혼례식 "참 멋있어요"(+영상,화보)
- “FWYSO 봄 연주회에 한인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UW동아시아도서관, 김봉준 작가 초청 행사
- [기고-샘 심] 제44선거구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출마하는 이유
- 오리건 한인, 어머니 숨지게 한 양로원에 1,000만달러 소송
- 한국 유명베이커리 파리바게뜨, 린우드점 드디어 내일 오픈한다
- [서북미 좋은 시-이춘혜] 나그네 길에 길동무
- 샘 심 시애틀한인회 부회장도 워싱턴주 하원 출마한다
- 시애틀 영사관, 중소벤처기업 지원협의체 개최
- 한인2세들이 시애틀 영자신문 인수했다
- 미국프로축구 열린 시애틀 축구장서도 "Korea"
- 코리아나이트 행사 전‘코리안 푸드트럭’운영
- 시애틀영사관 청사 경비 및 청소용역 입찰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25일 토요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대한산악회 25일 토요산행
시애틀 뉴스
- 애드리언 디아즈 시애틀 경찰국장 잘렸다
- 시애틀지역 집값도 큰 폭으로 올랐다
- 워싱턴주 10대 소년 하이킹중 400피트 절벽 아래로 추락했는데 경미한 상처만
- 빌 게이츠 전처 멀린다, 여성 인권단체에 10억달러 기부
- 시애틀지역 정신질환자 자연환경서 치료한다
- 시애틀서 가족부양하기 전국 '탑5'
- 시애틀지역 주민들 여행 선호지가 바뀌고 있다
- 시애틀 유명 정치로비회사 파산 모면했다
- 미국 대선 앞두고 국가부채 '부각'…"10년물 국채금리 10%"
- 한국 유명베이커리 파리바게뜨, 린우드점 드디어 내일 오픈한다
- 이런 사람이 시의원이었다니…50대 전 바슬시의원, 20살 여자친구 살해
- 시애틀 여름축제 서막 '프리몬트 페어' 다음 달에
- “아번경찰관 총격은 정당방위 아니다”
뉴스포커스
- '尹 축하난' 거절 인증 릴레이 시끌…"난이 무슨 죄"
- 김정숙 여사, 文전용기 인도 순방때 '기내식 6292만원'
- '명품백' 최재영 11시간여 2차 조사…"김 여사, 대통령실·보훈처 직원 연결"
- SK 흘러간 '노태우 비자금'…국고환수 대신 노소영 몫, 왜?
- 이성윤, 김건희 7대의혹 '종합특검법' 발의…도움 준 공무원도 수사
- 정부 "오늘부터 '전공의 연속근무' 단축…복귀시 불이익 최소화"
- 최태원 1.4조 어디서 마련하나…'세기의 이혼'에 SK 지배구조 영향권 2
- 매일 '159명' 담배로 사망…'흡연천국'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
- 8월부터 '성범죄 전과자' 운전학원 강사 자격 취득 못한다
- 전세사기법 개정 '청신호'…피해자단체 "정부대안, 정상 작동땐 일부 수용"
- 급등한 집값 'MB 시절'로 되돌리면, 혼인건수 25% 증가한다
- '돈봉투 의혹' 송영길, 163일 만에 석방…"무죄 입증할 것"
- "길, 김호중과 1~3차 함께"…스크린 골프장→식당 이동 CCTV 포착
- "최태원, 노소영에 1조3808억 현금으로 지급해야"…역대 최고액
- '文 전 사위' 수사 중앙지검 이관?…전주지검 "바뀌는 거 없다" 일축
- 내년 대학 무전공 선발 총 3만 7935명…2만 8010명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