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바람 바람
- 21-08-23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바람 바람
거풍하기에 알맞은 날이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볕이 좋다. 좁은 옷장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옷가지를 데리고 나와 뒷마당 구경이라도 시켜줘야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옷장에서 터져 나오는 원성을 피할 길이 없다. 저들인들 밝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어찌 그립지 않을까.
옷을 지고 여러 차례 계단을 오르내렸더니 팔다리가 뻣뻣하다. 등에 땀이 차기는 해도 갑갑하던 마음에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 더위와 가뭄이 계속되는 건조한 날씨와는 달리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 같은 답답한 일상에 마음마저 꿉꿉하던 차였다.
햇살이 겅중겅중 뛰어와 반가운 친구 대하듯 한다. 점잖던 양복도 요란하게 악수를 하며 어깨를 들썩인다. 서로 만나 왁자하게 떠들고 싶은 것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나란히 늘어선 옷가지들이 바람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연다.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가 마당에 수북이 쌓인다. 이태나 바깥 구경을 하지 못해 우울증이 생겼다느니, 오랜만에 외출하는 주인이 자기를 그냥 지나쳐가서 서운했다느니, 그래도 올여름엔 특별한 총애를 받아 다른 옷에 눈치가 보인다느니 볼멘소리에서부터 은근한 자랑까지 마치 구중궁궐 옛 여인들의 이야기 같다.
먼지를 털털 털어버리는 양복이 듬직하다. 원피스가 한들한들 바람과 손을 잡고 왈츠에 한창이다. 우리 집 뒷마당이 흥겨운 무도회장이라도 된 듯하다. 왈츠 곡을 시리즈로 틀어놓고 한껏 분위기를 잡아볼까. 힘겨운 여름을 건너려면 어깨에 자꾸만 내려앉는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바람과 한바탕 어울려 노는 것도 좋을 듯하다.
어둑한 구석에서 종이 상자에 갇혀 지내던 두루마기가 있었다. 명색이 비단이었지만, 평생 한 번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한복 차림을 할 기회도 드물거니와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옷 정리를 할 때 가끔 상자를 열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색 고운 두루마기는 죄 없이 미국까지 끌려와 햇볕 한 조각 들지 않는 곳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다가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들어 갔다.
오랜만에 펼쳐본 두루마기 한쪽에 손바닥만 한 얼룩 같은 게 있었다. 곰팡이였다. 앞쪽은 멀쩡한데 등판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루마기는 비단의 생명을 잃은 채 곰팡이의 서식처로 변해가고 있었다. 누가 이민해 올 때 이브닝드레스를 잔뜩 사 왔다가 한 번도 입지 못하고 버렸다더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래전 어느 해 가을, 아파트의 좁은 공간에서 무청을 말려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새파랗게 데친 무청을 가지런히 널어놓았더니 금세 입안에서 시래기 된장찌개 맛이 감돌았다. 구수한 상상도 잠시, 갑자기 날씨가 변덕을 부리더니 연일 비가 쏟아졌다. 건조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수선을 떨었지만, 이미 곰팡이가 생긴 무청을 어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재활용을 하거나 저장을 한답시고 분주한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럴싸한 명분으로 위장한 욕심은 삶의 곳곳에서 바람이 드나드는 길을 막기 일쑤였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에 곰팡이가 생기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비우지 못하고 덜어내지 못한 마음은 볼썽사나운 짐이 되어 먼지만 부옇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정작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은 두루마기나 무청이 아니었다.
팔만대장경이 천년이 되도록 온전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의 구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 환기가 되도록 건물을 지은 장인의 지혜와 바람의 생명력이 참으로 놀랍다. 해인사가 자리한 가야산 계곡에 머무는 바람이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바람에 마음을 거풍하고 싶다. 대장경판을 차곡차곡 쌓으면 백두산의 높이보다 훨씬 더 높단다. 그토록 많은 경판을 세세히 어루만지던 바람에 옷깃을 슬쩍 스치기만 해도 천년 목판의 향기가 마음 깊숙한 데까지 스며들 것 같다.
소박한 바람으로 시작한 하루, 오늘도 바람을 붙들고 선다. 바람 속에서 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옷의 결을 따라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고 있다. 때론 무서운 힘으로 삶을 뿌리째 흔들어 대던 바람이 오늘은 정겹게 다가와 날 위로하고 있다. 움츠러든 어깨를 감싸며 바람이 이른다. 여름을 잘 견뎌내야 한다고, 끝까지 버텨야 이길 수 있다고.
험하고 먼 길을 함께 가자며 바람이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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