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한칠] 보이는 것만
- 21-08-08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보이는 것만
눈으로 말하는 세상이다. 온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았다. 서로 눈 밖에 볼 수 없으니, 평상시 어색했던 아이 콘택트가 자연스럽다. 희로애락이 마스크 위 눈빛에서 그대로 배어 난다. 눈은 우리 몸과 마음을 나타내는 창이라더니 맞는 말이다.
‘시력이 바뀌었습니다.’
눈 검사를 받았다. 검안의는 새로운 안경을 권했다. 줄곧 쓰던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새것으로 바꾸지 않겠다고 우겨 볼까. 순간, 나는 보이는 만큼만 본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전문가 의견을 받아들였다.
새 안경 속 만상이 말갛다. 책꽂이에서, 책등이 또렷한 얼굴로 나를 알은체한다. 내가 찾지 못해 사라졌다고 궁시렁거렸던 책이었다. 그동안 대충 보고는 죄다 본 것처럼 착각했나 보다. 내 콧등에 앉은 안경은 그동안 내가 못 보았던 것을 자꾸만 보여준다.
안경을 추어올리며 하늘을 본다. 하늘을 이고 있는 청회색 지붕이 낯설게 다가왔다. 온몸으로 땡볕과 씨름 중이었다. 지붕 군데군데 작은 불청객이 제집인 양 자리 잡았다. 그동안 못 보았던 바짝 마른 이끼류였다. 홈통 얼룩도 한몫 했다. 지붕 전문 청소 업체가 등장했다. 지붕에서 뿜어내는 시원한 물줄기(soft washing)는 이끼와 지의류 때를 사정없이 떨어냈다.
집 주변으로 내쳐진 때를 씻어내며, 드라이브 웨이까지 고압세척(pressure washing)을 했다. 세정제를 뿌리고 맷돌처럼 갈아댔다. 평소, 깨끗하게만 보였던 집 진입로였다. 웬걸, 타마구같은 검은 땟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한 번도 때가 낀 줄 몰랐는데, 어느새 저리 쌓였구나. 내가 놀라니, 차도 옆 보랏빛 라벤더도 덩달아 놀란 눈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 방정(方正)하다고 여겼다. 큰일을 저지른 적이 없다 보니, 은근한 자부심을 가졌다. 정갈하게 탈바꿈한 드라이브 웨이를 보니, 내게도 쌓였을 그 무엇이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게 생각과 말로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 라는 기도말이 떠올랐다. 무형의 세정제를 내 마음에 뿌린다면, 어떤 땟국이 얼마나 나올까.
지붕과 진입 차도가 반짝인다. 왜 나는 머리와 발만 닦은 것 같을까. 그제야 내 눈에 외벽이 들어왔다. 그래, 이제 몸이다. 페인팅 작업을 시작했다. 괜찮은 업체를 선택했다. 집 이미지를 좌우하는 페인트 색깔도 신중하게 살폈다.
첫날, 고압세척을 시작으로 외벽 페인트칠하는 데에 나흘이 걸렸다. 집 얼굴인 현관문까지 깔끔하게 마감했다. 이제 머리 감고 발을 닦고, 세수와 몸치장까지 다했다. 단장을 하고 보니 새집처럼 느껴졌다.
외벽 높은 곳에 손바닥만 한 환기구가 보였다. 하나는 부엌에서, 다른 하나는 세탁실에서 뿜는 공기 배출기다. 그 팬 덮개를 딱따구리들이 기를 쓰고 쪼아댔다. 구멍이 뻥뻥 뚫렸다. 거기서 자리 잡을 태세였다. 망가진 팬 덮개를 갈아 끼워야 했다. 손재주 탓하며 핑계 대기엔 너무 작은 일이었다. 엉겨 붙은 실리콘을 뜯어내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데 내겐 젖먹던 힘까지 필요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양복 차림에 펜으로만 일했던 당신은 휴일에도 늘 바쁘셨다. 온갖 집안일을 찾아내어 고치고 만들곤 하셨다. 내 장난감도 만들어 주셨다. 그야말로 핸디맨이셨다. 집 관리를 잘하려면 집 안팎을 꼼꼼히 살피는 게 손재주만큼 중요하다.
대개는 일 년에 한 번 병원에서 주치의를 만나 정기 검사를 받는다. 말못 하는 집이라고 강산이 바뀌도록 그냥 놓아두었다니, 나는 참 무심한 주인이었다. 반성 모드가 무르익었나, 뿌연 유리창이 어른거렸다. 평시, 창 너머로 뒤뜰을 즐기곤 했는데, 왜 인제야 부유스름하게 보일까. 집 안쪽 유리는 가끔 닦아 주었지만, 외관 유리는 순전히 비바람에 맡겼었다.
유리창 청소 전문가는 창문 개수를 알려 주면 견적을 주겠단다. 살면서 1, 2층의 창문이 몇 갠지 알고 있는 이가 있을까.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놀랐다. 유리창 청소를 마친 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유리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창 너머 바깥이 투명하게 맑았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사물을 세세하게 봐야 이해도가 높아진다. 안경 너머로 세상을 본다. 때 묻은 거울로 보면 내 얼굴도 깔끔치 않듯이 눈도 마찬가지다. 렌즈는 내 눈에 맞는 도수여야 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래야 청정한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사람을 대할 때는 더욱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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