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정동순] 기승전닭
- 21-07-26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기승전닭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울보, 까만 조약돌, 하구잽이에 이어 기승전닭. 만날 때마다 닭 얘기를 한다고 놀리듯 누가 나에게 붙인 별명이다. 반려동물이라면 대부분 강아지나 고양이를 떠올리는데 우리 집은 닭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은 가족들의 안부보다 먼저 닭의 안부를 묻는다. 닭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닭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 변명하자면 할머니의 손주 자랑, 낚시꾼의 월척, 쇼핑 정보 등, 사람은 누구나 관심이 많은 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미국 직장에서는 동료들 사이의 소소한 대화가 참 중요하다. 스몰 토크나 채팅은 일하는 시간을 축내는 쓸모없는 잡담이 아니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사소한 대화는 서로에 대한 서먹함과 긴장감을 풀어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정치나 종교, 사회적 이슈처럼 관점이 달라 언쟁으로 갈 수 있는 화제는 금물이다. 오히려 팀워크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반면에 스포츠, 반려동물, 취미, 가벼운 일상에 관한 얘기는 비교적 안전한 주제다.
동료들과 말은 해야겠고 안전한 화젯거리를 찾다 보니 내 일상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닭이 늘 주인공이 되었다. 자녀나 남편에 대해서는 잘하는 이야기를 하면 자랑이 되고, 흉을 보면 형편없이 그들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 대화의 뒷맛이 깔끔하지가 않다. 눈치 없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정치색도 없는 닭 얘기는 내가 좀 푼수처럼 보일지언정 뒤끝을 걱정할 일이 없다.
우리 닭들은 근무하는 학교 직원들도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그만큼 닭 얘기를 했다는 뜻이다. 어느 날, 활짝 핀 사과꽃 그늘 아래서 그림처럼 놀고 있는 닭 사진을 교사들의 대화방에 올렸다. 마이크가 문자를 날렸다. 왜 갑자기 배가 고프지? 조금 후에 로스가 받아쳤다. 닭들이 다 어디 갔지? 한 마리도 안 보이네. A dingo ate my chickens! (호주 들개가 다 잡아먹었어). 싸인펠드(Seinfeld)란 미국 시트콤의 유명한 대화를 패러디한 내 대답에 사람들은 LOL이다. 그날 마이크는 딩고가 되었다. 이런 농담 따먹기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가슴에 울혈처럼 뭉쳐 있는 갑갑증을 풀어준다.
인간관계에 있어 침묵은 오해를 부르기 쉽다. 저 사람이 무엇엔가 화나 있나, 기분이 안 좋은가, 혹은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가? 더구나 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침묵을 잘 견디지 못한다.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며 조신하게 앉아 있는 것은 나에겐 고문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상대방이 얘기하게 만들고 잘 들어 주어야 대화의 고수인데, 나는 아직 그 기술을 써먹지 못하고 내 얘기를 위주로 하는 하수다.
돌이켜 보니, 침묵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는 습관은 꽤 오래된 듯하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십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골목길을 내려가면 경화가 살고 있어 가끔 같이 신작로를 걸어 학교에 갔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는 것이 이상해서 내가 무슨 말을 건네면 경화는 늘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우리 집에 어제 병아리 깠다. 그래서? 응? 그래서? 너무 귀엽다고. 그래서? 경화는 침묵이 더 나은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때 경화가 왜 그랬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배워서 남 주자’로 밥 먹고 사는 선생인지라, 학생들에게 질문했을 때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상황도 침묵을 못 참는 내 급한 성미를 부채질한다. 의견을 말하고 후회할지언정, 남의 의견에 묻어가려 하지 말라는 적극성을 주문하곤 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기회주의자의 비겁한 태도라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배우는 교실에서는 침묵은 절대 금이 아니기에.
한데 요즘, 사람에게는 인품을 완성해 주는 언품이 중요하다는 것을 책을 통해 배운다. 디누아르는 <침묵의 기술>이란 책에서 침묵은 가장 강력한 언어라고 소개한다. 침묵은 나를 다스리고 타인을 움직이는 기술이라고 갈파한다. 지혜에서도 상책은 침묵이고, 중책은 말을 적당히 적게 하는 것이며, 말을 많이 하면 하책이라 한다.
언행에 관한 어떤 분의 글도 마음에 와닿아 수첩의 첫 장에 써 놓았다. ‘말이 많으면 반드시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오기 마련이고 실수를 범하게 되므로 사람이 경박스럽게 보인다.’ ‘칭찬하는 말도 조심해서 하고, 청하지 않으면 충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진중하게 대해 보기로 작정하고 말을 줄여 볼까 한다. 기승전닭이란 가벼운 별명에서 벗어나 나의 언품을 도모해 보고자 한다.
한가지 걸림돌이 있다. 우리 식구는 모두 닭을 귀애한다. 뜻밖에 얻은 수탉 봉구 이야기부터 닭에 대한 화제는 늘 넘쳐난다. 그러니 닭 이야기가 지겨운 사람은 내 앞에서 ‘닭’은 금지어다. 계란이나 병아리 등 닭을 연상시키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코가 풀린 실타래처럼 닭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한인 여러분, 챗GPT로 가게 홍보하세요”
- 바슬시 5월 아시아태평양의 달로 선포
- 광역시애틀한인회와 부천상공회의소 MOU
- 시애틀영사관, 시애틀국제영화제 특별후원
- KWA 대한부인회 올해 장학생 선발한다
- 한국학교 서북미협의회 합창대회서 코가한국학교 ‘대상’(+영상,화보)
- 조기승 회장 모친상속 14대 서북미연합회 힘찬 출발(+화보)
- 104세 생일 맞은 오리건주 최장수 신명순 할머니 생일잔치 열려
- [시애틀 수필-문해성] 글월 문, 바다 해, 별 성
- [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김철훈 목사 소고(小考-2)
- [서북미 좋은 시-이매자] 아버지의 등
- 워싱턴주 한인교계 큰별 박영희 목사 별세
- [부고] 조기승 서북미연합회 회장 모친상
- [공고] 제 35대 워싱턴주 한인상공회의소 임시이사회 및 총회
- 워싱턴주 한인그로서리협회(KAGRO) 회원 권익과 안전 위해 최선
- “한인 여러분, 핀테크를 통한 재정관리ㆍ투자 알려드립니다”
- 시애틀 한인마켓 주말세일정보(5월 3일~ 5월 6일, 5월 9일)
- 샘 심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수치심에서 자부심으로 바뀌었다"
- 시애틀 롯데호텔 '미국 최고 호텔 7위' 올라
- “샛별문화원으로 한국문화 체험하러 왔어요”
- "시애틀 한인여러분은 하루에 몇마일 운전하시나요?"
시애틀 뉴스
- 워싱턴주 이젠 ‘미국 최고 좋은 주’아니다
- 보잉 737기 또?…세네갈서 여객기 활주로 이탈[영상]
- 시애틀시내 전기차 충전 이렇게 이용하면 된다
- UW 땅이 인디언과 관련돼 있다고 교수와 학교측 법정싸움
- 보잉 "또"..이스탄불서 767 앞바퀴 안내려와 동체착륙
- UW 시위대 요구에도 불구하고 "보잉과 관계단절 안할 것”
- 하워드 슐츠 전 스타벅스 CEO "영업부진? 답은 결국 매장에 있다"
- FAA "보잉 787드림라이너 기록 위조 등 조사중"
- 시애틀지역 집값 12% 올랐다
- 시애틀서 주택 리스팅 가장 좋은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다
- 시애틀 이번 주말 처음으로 80도 돌파한다
- <속보> I-90서 탈출했던 얼룩말 1주일만에 발견됐다
- 시애틀 적자예산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나
뉴스포커스
- 한전 1분기 영업이익 1.3조…연료비 하락에 3분기 연속 흑자
- 정부, 의대증원·배정 자료 49건 법원 제출…이르면 내주 선고 전망
- 尹 정부 3년차, 물가·민생 안정 최우선 28%…경제회복 17%
- '육아휴직 2년'에 승진도 쏜다…법령 뛰어넘는 재계 저출생 대응
- "44년이 흘렀어도 아직도 생생"…5·18 민주묘지 추모객 발길 '북적'
- '부산지법 앞 흉기 살해' 50대 유튜버 구속…"도주 우려"
- 살인사건 피의자가 명문대 '의대생'이면 생기는 일
- "국민의 요구"…거리로 나선 野6당, '채상병 특검법' 尹대통령 압박
- 정부 "외국의사, 당장 투입 안해…'의대증원' 자료 충실히 제출"
- 매출차 고작 '145억'…편의점 투톱 GS25·CU 경쟁 더 치열해진다
- 전국 아파트 입주율 63.4%…미입주 사유, '세입자 미확보' 3개월째 ↑
- 尹 '채 특검' 거부권 시사에…민주 초선들 '천막농성' 나선다
- '역대급 하자' 오룡 힐스테이트 논란에…현대엔지니어링 "깊은 사과"
- 기재차관 "배추·양배추·김 할당관세 신규 적용…김 양식장 개발"
- 아파트 24층서 생후 11개월 조카 던진 고모…母 요리하는 사이 비극
- 민주 "정부, '라인 사태' 수수방관 굴욕외교…외통위·정무위 긴급 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