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공순해] 여름은 한창
- 21-07-12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여름은 한창
방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며 아이들이 뛰어 들어왔다. 친구가 방문하기로 돼 있는데 언제 올 지 몰라 여기서 기다릴 거란다. 셋이 나란히 창에 매달려 목을 빼고 밖을 내다본다. 밖에 누가 왔는지 보려면 애들은 이렇게 할머니 방에 온다. 집 앞쪽으로 벽을 툭 털어낸 프렌치식 창문이 넓어, 오가는 사람들이 죄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문득 스치는 생각, 만일 창이 없다면 아이들이 자주 이 방에 올까. 그런 점에서 창은 매우 유용하다. 내가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 쉬는 의자는 아이들이 앉아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막내에겐 다리 올려 쪼그리고 앉아 낮잠 자기 알맞은 크기이기에 의자의 팔걸이 하나는 그 힘에 밀려 빠진 나머지 지금 덜렁거리고 있다.
들고나는 것이 환히 보여서일까, 손녀는 샤핑 다녀오면 먼저 내 방에 들린다. 백에서 물건을 모두 꺼내 보여주며 왜 샀는지, 얼마에 샀는지, 사는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 준다. 그것도 한국말로 또박또박. 노력하는 모습이 참 예쁘다.
보통 할머니 방엔 아이들만의 장소가 있다고 한다. 우리 큰놈에게 할머니 방은 프린터가 있는 곳이어서 복사물 찾으러 온 길에 의자에 몸을 내려놓고 미래의 제 관심사를 할머니와 나누는 자리다. 큰놈의 몸 크기가 막내만 했을 땐 침대 밑과 의자 뒤가 세 아이 숨바꼭질 장소였다. 몸이 자라고 난 뒤 그럴 수 없는 큰놈은 그 점을 참 아쉬워한다. 둘째, 손녀도 제 책상이 생기기 전엔 소중하다 싶은 물건을 다 내게로 가져왔었다. 나는 서랍이 없으니까 할머니가 보관해 줘. 할머니에 대한 신뢰인 것 같아 기쁘게 맡아 보관해 줬다. 셋째는 지금도 제 비밀 상자를 그 의자 밑에 숨겨 놓고 있다. 그리고 가끔 살짝 들어와 그 밑에 몸을 숨겼다 인기척을 낸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놀란 시늉을 해준다.
창이 있음으로써 아이들과 연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창은 소통의 통로다. 창으로 해서 이웃집의 나고 듦도 알게 된다. 아마 그들도 내 나고 듦을 그들의 창을 통해서 인지할 것이다. 삶에 이웃집 창문이 없다면 어떨까. 아마도 서로 벽 속에 갇혀 살겠지. 그 완고함으로 긴장감을 이겨내기 힘들겠지.
그러고 보니 정겨웠던 들창이 떠오른다. 50년대의 당숙 댁 들창문이다. 육촌 동생 재수가 태어나던 날, 유순이 고모가 어머니를 부르러 왔다. 급하다는데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같이 가겠다고 떼를 썼다. 나 때문에 지체되자 먼저 돌아가 기다리던 유순이 고모가 들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애 나와요, 지금. 빨리! 놀란 어머니는 나를 영식이네 집 앞에 버리고 뛰어가셨다. 신발도 없이 버려진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들창으로 내다본 유순이 고모가 다시 나와 날 업고 갔다.
들창문을 통해 이웃과 서로 나누고 참견하며(?) 살아가던 4, 50년대 서울 골목 풍경, 지금은 그런 들창문이 없다. 한국 어디에도 없다. 들창문도 없고 골목도 없다. 그 시절 서울을 벗어나 지방으로 가면 들창문 대신하는 것은 툇마루였다. 먼 길 가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가 물 한 그릇 청해 목축일 수 있었던 툇마루. 들창문이 없어진 만큼 지금은 툇마루도 없다.
미국 집엔 툇마루 대신 포치가 있었다. 각자의 포치에 나와 앉아 담 너머로 큰 목소리를 건네며 떠들던 할머니들, 테리와 앤은 안녕하신지… 그들 목소리로 해서 마을은 활기를 띠었다. 얼마 전 구글맵 스트리트 뷰로 찾아보니 포치가 있던 계단에 앤의 남편, 늙은 조우 혼자 졸고 앉아 있었다. 한국이고 미국이고 이처럼 기억의 향기는 알게 모르게 증발돼 가고 있다.
사라진 것엔 빨래터도 있다. 동네 정보의 진원지 빨래터. 요즘 이를 대신하는 건 IT 기능이다. 컴퓨터가 됐든 스마트폰이 됐든 모두 사각 틀에 머리 박고 등 돌리고 앉아, 좌우 돌아볼 겨를도 없다. 얼굴 볼 일이 없기에 정서도 죽어버렸다. 정겨운 정서가 아니라 모두 나무껍질 같은 감정으로 꾸덕꾸덕 말라버렸다. 변화에 반발하는 사람도 없다. 일소처럼 꾸벅꾸벅, 적응도 빠르다. 누가 더 기기를 잘 다루나, 속도만 자랑한다. 뿔만 자란다.
이런 점에서 창은 유리한 고지다. 들창은 사라졌지만 건물의 표정을 위해 건축주들은 창 만들기를 잊지 않는다. 다행이다. 창은 건물의 시공간을 넓히고 마음의 시공간마저 확장해 준다. 오늘도 창으로 하여 마음의 창이 넓어진 아이들이 머리 빼고 내다보며 친구를 기다린다. 창으로 방을 들여다보고 선 마당의 나무도 함께 기다린다. 여름은 한창 자라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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