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조순애] 노란 조끼

조순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노란 조끼 


상쾌한 아침, 출근을 위해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탄다. 조금 달리다 보니 도로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노란 작업용 조끼(Safety Vest)를 입은 사람들을 보니 밝았던 아침 기분이 가라앉는다.

 60마일 이상으로 달리는 고속도로 주변에 널브러진 각양각색의 쓰레기는 도로를 통과하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누가 버렸을까? 2007~2008년 서브 프레임 주택담보대출로 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고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늘어난 실직자들로 어려운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어느 지역이든 집 없는 사람이 많이 생겨 이제는 시골의 작은 도시에도 홈리스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고속도로 주변으로 홈리스 텐트촌까지 생길 정도로 증가한 노숙자들은 미국의 또 다른 사회 문제가 되었다. 

특히 고속도로변의 이런 모습들은 운전자의 짜증을 키운다. 집 없는 사람들의 깊은 사정을 헤아리기보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의 눈에 띌 것을 생각하니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러나 노숙자 문제는 미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살게 되었다는 우리 한국에도 길에서 자는 노숙자가 상당수 있다. 이들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해 주로 지하도에서 생활한다. 언젠가 고국을 방문했을 때 지하도를 지나는 데 앉아 있던 한 노숙자가 내 앞을 지나는 중년 부인의 치마를 잡고 구걸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부인은 갑자기 노숙자에게 잡힌 치맛자락에 난처해하며 어쩔 줄 모르다가 할 수 없이 지갑을 열어 지폐 한 장을 던지듯 주고서야 가던 길을 재촉할 수 있었다. 

노숙자들은 주로 여인을 대상으로 돈을 요구한다고 한다. 한국의 노숙자와 미국의 노숙자의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의 노숙자는 지나는 사람의 신체 일부에 손을 대는 행동을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미국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면 법적으로 “불쾌한 접촉”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들의 구걸은 생존을 위한 행위라고 해도 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이건 비단 노숙자들의 도덕성 문제만은 아니다. 그들이 없는 곳의 큰 도로 주변에도 빈 병, 깡통, 비닐봉지 등이 눈에 자주 띈다. 하면, 이는 지나가는 운전자가 버렸다는 것인데 운전하면서 차창 밖으로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이라면 노숙자들의 정신상태와 무엇이 다른가? 사람의 행동은 마음과 생각에서부터 나온다. 무의식 속에 그들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쉽게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인격이 그렇다고 봐야 하리라. 생각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삶에 나타나는데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성숙하지 못한 인격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TV에서 미국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았다. 수많은 홈리스가 도시를 어지럽히지만 미국에는 홈리스보다 더 많은 자원봉사자가 있어 그들을 지원하고 돕고 있기에 미국 사회가 유지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최고 영웅들은 바랜티어(자원봉사자)들이란 타이틀의 다큐멘터리였다. 통계를 보면 미국 성인 31%가 학교 병원 교도소 노인복지센터 경찰서 소방서 등 많은 커뮤니티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돈을 받지 않고 바랜티어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숨은 봉사자들로서 이들은 사회와 나라를 위해 이 시대에 필요한 이름 없는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들의 노동력을 임금으로 환산하면 연간 1천 5백억 달러(15 Billion)에 달한다고 한다. 미국이 숱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이 좋은 전통이 현재 세계 1위 미국을 잘 굴러가게 만들고 있다. 

  고속도로의 위험한 지역에서 노란 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을 보면서 벌써 십수 년 전의 부끄러운 내 모습이 겹치었다. 지인들과 함께 시골의 작은 바닷가에 조개도 캘 겸 여행을 갔다. 새벽 일찍 물때를 맞춰 출발했지만 이미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와 같은 관광객이 많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간혹 노란 조끼를 입고 움직이는 노인들이 보였지만 나의 관심은 온통 조개 구멍 찾기에 집중되어 주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란 조끼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바닷가 주변에 버려진 플라스틱 물병과 캔 등의 쓰레기들을 큰 자루에 담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그 노인들은 그곳 주민이었고 우리는 조개를 캐기 위해 온 외지의 관광객이었다. 내가 조개의 정량을 채우고 나서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필 때 한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개잡이를 즐기고 있나요? ( Do you enjoy catching shellfish?)”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번엔 내가 물어보았다.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주우시면 얼마나 버세요?” 할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나는 부끄럽고, 당황했다. 그는 웃으면서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을에 외부 관광객이 많이 와서 기쁘게 조개를 캐고 즐겁게 여행하라고 청소한다고 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민망한 순간이었다. 

  그렇다. 이것이 봉사자의 정신이다. 또한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미국이 지탱해 가는 힘이기도 하다. 곳곳의 홈리스와 달리는 차에서 쓰레기를 던지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어도 그 뒤편에 노란 조끼의 봉사자들이 있어 언어와 문화와 민족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미국이 합중국으로 유지 되는가보다.

 우리 일행은 조개를 채취하고 주변에 쓰레기를 말끔히 정리하고 왔다. 하지만 지금도 노란 조끼를 보면 그때 그 노인 봉사자의 말이 귀에 생생하다. 나도 퇴직하고 나면 지역 사회에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로 봉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노란 조끼를 입고 지저분한 곳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백발의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새 힘이 솟는 것같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