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콘크리트 벽
- 25-02-03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장)
콘크리트 벽
콘크리트 벽이 거기 있었다.
그로 인해 무려 179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것도 승무원 2명이 살아남았을 뿐, 승객은 전원 사망했다. 태국 방콕을 떠나 전남 무안국제항공에 도착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새 떼와 충돌하며 첫 번째 위기를 맞았고, 비상 착륙 시 랜딩기어가 작동하지 않아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그렇게 두 번의 위기는 피했지만, 결국 동체 착륙 후 방위각시설인 콘크리트 벽과 충돌해 완전히 폭파됐다.
그것만 없었더라면 살았을 사람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모두 콘크리트 벽을 탓했다. 단장지애(斷腸之哀)가 이보다 더할까. 공항 밖 저 멀리까지 유가족들의 울음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콘크리트 벽이 거기 있었다.
팰리세이즈 지역에 검은 연기 기둥이 솟았다. 이곳은 아마겟돈이라고 여기저기서 외쳤다.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피난길에 올랐다. 소용돌이치는 불길 속으로 차를 몰았다. 거센 바람에 몸을 싣고 불길은 더 빠르게 번져갔다. 바닷가에 어깨를 나란히 했던 고급 주택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집주인들은 마치 관망실에서 화장이 다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까맣게 타서 뼈만 남은 집터를 바라봤다.
12만 채의 집이 사라져 버린 화장로에서 온전한 형태로 서 있는 집 하나가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집. 그로 인해 그 집은 살아남았다. 또 다른 집도 콘크리트 설계로 화마 속에서 견뎌냈다. 뿐인가. 세계적인 게티 미술관도 방화 콘크리트 벽과 타일 지붕, 정교한 스프링클러 시스템 덕분에 수많은 문화유산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단단함으로 누군가를 죽이기도 했고, 누군가를 지키기도 했다.
막내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벌써 세 번째 사춘기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큰 아이는 울었고, 둘째 아이는 밖으로 나갔으며 막내 아이는 안으로 파고들었다. 뭐 하나 쉽지 않았지만, 새로 겪는 막내의 사춘기는 내 마음의 여유마저 빼앗아 갔다.
상담사가 내게 물었다. 당신의 아이는 내향적인가요, 아니면 외향적인가요? 난 대답했다. 내향적이요. 하지만 아이는 대답했다. 전에는 내향적이었지만 지금은 외향적이에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말수가 적으며 바깥 외출도 거의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집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서 화상전화가 왔다. 이러한 고민을 나누니, 사내아이 하나 키우는 게 어디 쉬운 건 줄 알았냐, 달관한 듯 웃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단단한 벽처럼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 감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 그래서 바깥에서와 집안에서의 행동이 달라지기도 한다며 그 예로 내 동생을 들었다.
동생은 집에서 말이 별로 없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꾸지람을 많이 들어서인지 늘 조용했다. 물론 몸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장난꾸러기처럼 움직였지만, 아버지라는 벽은 늘 불같이 이는 그의 생각과 행동을 막아주었다.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고 학교 밴드에서 보컬로 뽑혔다고 했을 때, 가족은 모두 놀랐다. 그리고 축제 공연장에서 핑크색 머리카락과 과격한 로커 복장을 한 동생을 마주했다. 심지어 무대를 장악하며 관중을 흥분케 하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벽에 부딪혀 핑크 머리카락의 꿈은 하루 만에 사라졌지만, 동생은 뭔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자신도 할아버지라는 벽이 너무 높고 단단해서 감히 부딪쳐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집안에서와 바깥에서의 모습이 아주 달랐다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할아버지라는 벽이 있어서 참 든든했다고, 돌아가시고 난 뒤엔 그 벽이 없어 의지할 데 없이 허전하고 외롭다고 고백했다.
나와 내 남편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아이에게 콘크리트 벽이었다. 그동안 안전한 벽이 되어 그를 세상 화마에서 지켜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벽에 계속 부딪히는 아이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바깥에 나가면 여느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내아이들과 엉뚱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다.
요 며칠 남편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춘기는 역시 부모와 아이 둘 다에게 독립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서로 동의했다. 이제 아이 주위에 둘렀던 높은 벽을 낮출 때가 됐다. 자유롭게 부모의 벽을 넘어 자신의 세상으로 갈 때가 됐단 뜻이다.
단지 아버지가 그랬듯, 내게도 그 높고 단단한 벽이 그리움이 되어 단장지애로 변하는 시간이 좀 늦게 찾아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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