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미 좋은 시-김소희] 를리외르 이야기

김소희(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를리외르* 이야기


착한 손이 

한 페이지를 집어둔 순간, 버리지 못할 운명이 되고 만다


산화가 끝난 후에도

분해되지 않는 것들은 은밀하지

 

어긋나면서 자라난 시간

부풀어 오른 기억을 빼내면 

종이 테두리까지 번진 어둠의 누설 


단내나는 입김으로, 안으로만 열리는 독백을 꿰맬 때 


자색 자두 알 같은 일몰이 방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내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


나무를 향해 서 있는 꽃 


예상치 못한 빛에 기대어 빼곡히 적힌 날들을 견디고 있지 


찰나의 포옹이 내 안에 남아있는 

연두의 이야기를 포용하게 만든다는 걸 믿으니까


보수된 것은 견고하고 아름다울 거야


부서진 밤의 테두리를 걷다 보면 

유순해진 심장 사이로 

낯선 글자 같은 생에, 금박 문양들이 새겨진다고 


잘 흔들리지 않던 단출한 방안이 환해지도록



*책을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보수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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