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그날, 거기서
- 24-09-04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그날, 거기서
축제가 끝나버렸네. 이번 파리올림픽 폐막을 아쉬워하며 여동생이 말했다. 평소 스포츠에 관심 없는 동생에게도 올림픽은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이벤트였나 보다. 특히 이번 올림픽은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도시 파리에서 100년 만에 열렸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올림픽은 지구상에 흩어진 다양한 나라의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경기를 치른다. 누구에게나 용기, 열정, 감동, 눈물, 사랑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지금껏 보아온 올림픽 하이라이트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 컴퓨터 첫 화면처럼 올림픽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88서울올림픽과 그날 거기서 일어났던 일과 내 모습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88서울올림픽을 통해 처음으로 외국인을 직접 보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지만, 올림픽 분위기를 생생히 느낄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표를 구할 수 있는 경기장을 찾아갔다. 배구 경기가 열리는 한양대 체육관이었다. 경기장은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선수들이 숨을 돌리고 전략을 짜는 시간, 뒷좌석에서 팝콘을 내밀며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얀 피부에 금발의 신사였다. 내가 서양인과 처음 나누는 인사였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소련 사람이라고 했다. 저렇게 친절하고 잘생긴 남자가, 학교에서 배운 무서운 그 공산당 나라 사람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진짜 소련 사람이 맞나 싶어 다시 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다고 했다. 소련팀을 응원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우리와 같은 사람이잖아?’ 당시 그 소련 신사도 나도 3년 후에 소련이 그렇게 해체될 줄 몰랐지만. 그날 거기서 내 안에 막혀있던 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벽이 허물어지니 더 이상 경계가 없었다. 처음 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경기에서는 바로 옆좌석에서 응원하던 근사하게 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대뜸 내게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내가 열심히 일본팀을 응원해서 일본인 줄 알았다지만, 어쩌면 그는 내가 자신과 같은 나라 사람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 경기가 아니면 어느 나라 선수들을 응원해도 괜찮았다. 국적과 관계없이 선수들을 응원하는 게 개최국 국민의 자부심이라 여겼다.
경기를 보는 동안 서툰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다음 날 같이 경기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싫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도저히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젊음과 올림픽이라는 분위기에 휩싸여 쉽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렇게 금세 사랑에 빠지리라는 걸.
사랑에 빠지는 것은 순간이었고 이유가 없었다. 그와 함께 일주일 동안 경기장 이곳저곳을 다녔다. 짧은 시간임에도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처럼 편하고 좋았다. 그 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뜨겁게 사랑을 키워갔다. 그러나 준비 없이 맞닥뜨린 현실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우리를 갈라놓았다. 아쉬운 젊은 날의 내 민낯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와 헤어지고 일본 문학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88서울올림픽, 그날 거기서의 몇 시간이 내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파리올림픽에서의 뒷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올림픽에서는 메달을 딴 선수들이 주인공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센강변을 걷다가, 몽마르뜨 언덕에서, 에펠탑 앞에서, 샹젤리제 거리의 작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 말이다. 올림픽 축제는 끝났지만,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 것만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디선가 올림픽을 즐겼을 그 사람도 나처럼 그때의 우리를 떠올리지 않을까. 이시하라 히로타미, 그대가 다음, 다음, 그다음에도 계속 올림픽을 보며 행복하고 늘 안녕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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