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개 같은 날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개 같은 날

 

아빠의 눈동자가 자꾸 벽시계를 살핀다. 발코니로 들어온 긴 그림자가 거실을 다 지나갈 무렵, 드디어 9시 시보가 울린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KBS 9시 뉴스입니다. 앵커의 첫마디가 떨어지자마자 아빠는 갑자기 욕실로 들어가 분노의 양치질을 시작한다. 맥락도, 논리도 없는 이야기 같지만 우리 집에선 매일 밤 9시마다 볼 수 있던 광경이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아빠는 분명 9시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양치질할 시간도 충분했다. 그런데 왜, 꼭 뉴스가 시작되면 양치질을 하러 가는 건지, 추리 소설의 결말을 쫓는 독자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아빠의 다음 행동에 더 집중했다.  

양치질을 마친 아빠는 소파 끝자리에 가 앉았다. 그 자리는 아빠의 지정석이었다. 이제 뉴스를 볼 준비를 다 마친 셈이었다. 아, 하나 빠뜨린 게 있다. 우리집에서 기르던 몰티즈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와 아빠의 무릎 위에 앉는 것. 그 자리는 녀석의 지정석이었다. 뉴스를 보던 아빠가 중얼거렸다. 에휴, 개 같은 세상. 그러면서 아빤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후에 알게 된, 아빠의 다소 해괴한 이 행동의 이유는 바로 ‘듣지 않을 자유’에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9시 뉴스는 시작하자마자 헤드라인 뉴스를 빠르게 훑고 나서 정치 뉴스로 넘어간다. 그 다음에 경제, 사회, 국제, 문화, 스포츠, 기상 뉴스 순으로 진행된다. 아빠는 정치 이야기만 들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듣느니 차라리 양치질하러 욕실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러고 돌아오면 정치 뉴스는 끝나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최고 안줏거리가 정치 이야기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씹고 씹다가 흐물흐물해진 그것을 주머니 속에 잘 넣어두고, 시도 때도 없이 다시 꺼내어 또 씹는다. 고된 삶의 탓을 나라에 돌리는 것일지도. 어쨌거나 아빤 술을 마시지도 못하면서 수시로 그 안줏거리는 주머니에서 꺼내어 씹고 또 씹었다. 정치 뉴스를 늘 빼먹으면서도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듣고 오는 건지 그것 또한 미스터리였다. 

술에 휘청이는 사람들은 한껏 꼬부라진 혀로 탄식의 말을 쏟아냈다. 개 같은 정치인들, 개 같은 세상, 개 같은 인생. 아, 정말 개 같은 날이네. 아빠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아빤 녀석을 쓰다듬으며 이런 말도 내뱉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참 예쁘다. 

마당 넓은 집에 살게 되자 남편과 난 개를 한 마리 입양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더 원했던 일이었다. 한국에서 놀러 오는 시누이 편에 4개월 된 골든레트리버 한 마리를 데려왔다. 옅은 금색 털과 처진 눈꼬리, 밤톨같이 박힌 까만 코까지. 너무 인형같이 예뻐서 아이들은 자기 품에 안고 온종일 바닥에 내려놓으려 하지도 않았다. 

개는 훈련 시키는 대로 앉아, 엎드려, 돌아, 기다려, 점프 등 다양한 명령어를 배우고, 익혔다. 가끔 사고를 쳐 혼날 때도 있었지만 눈치가 빨라 금세 알아듣고 행동을 수정했다. 우리 개가 천재견일지도 모른다며 아이들 때도 안 하던 자식 자랑에 점점 팔불출이 되어갔다. 산책하러 나가거나 목욕시키고 긴 털을 다 말리려면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개가 부리는 애교에 날마다 집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정말 개 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개 같이 예쁘고 행복한, 선물 같은 나날들이었다.

현대인들은 이런 개를 반려견이라고 부른다. 반려란 예전 같으면 배우자에게나 쓸 수 있던 표현이었다. 이런 기현상은 그만큼 개가 사람과 함께 살며 외로움을 달래주고, 기쁨과 행복 그리고 맹목적 사랑을 쏟아부어 주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개보다 사람이 낫다고 할만한 근거는 무엇일까. 단지 창조주가 만드신 만물의 영장이라는 거저 주어진 근거 말고 우리 스스로 동의할 만한 근거 말이다. 

요즘은 나 역시 아빠처럼 보지 않는 뉴스가 생겼다. 사회 뉴스다. 자기 자식을 방치하고 굶겨 죽인 엄마, 어린 딸을 지속해서 강간해 온 아빠, 같은 반 친구를 집단 린치한 어린 학생들. 뭐 하나 사람이 저지를만한 일들은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아빠처럼 뉴스를 보는 대신 분노의 양치질이나 해야겠다. 

개가 뭘 잘못 먹었는지 자꾸 설사를 한다. 입양해 온 집에 물어보니 하루를 꼬박 굶기란다. 개가 빈 밥그릇을 한 번 보고, 주인 얼굴을 한 번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똑바로 앉아 한참 기다려도 본다. 그래도 밥그릇엔 사료 한 톨 채워지지 않는다. 기대감에 쫑긋 섰던 귀가 이내 축 처진다. 그리고 거실 구석으로 가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감는다. 녀석의 마음속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 정말 사람 같은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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