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글월 문, 바다 해, 별 성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글월 문, 바다 해, 별 성


드디어 이름을 바꿀 기회가 왔다. 시민권을 받게 되면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원이기도 했다. 어쩌면 시민권보다 새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가 더 컸다.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그동안 만족하지 않았던 내 이름과 안녕을 고하고 싶었다.

무슨 이름이 좋을까? 어차피 미국에 살 거라면 미국식 이름이 좋겠지. 아니야, 부르기 쉬우면서 약간 동양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으면 좋겠는데…. 막상 바꾸려 하니 맘에 딱 드는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에게 묻자, 왜 바꾸려느냐는 핀잔만 받았다. 학생들에게 내 이미지에 어울리는 이름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말해준 이름은 제니, 스테파니, 올리비아, 에리카 등등, 뭔가 낯설고 나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름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이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너무 흔하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반에도 다른 학년에도 정숙이가 많았다. 이름이 싫다며 부모에게 떼도 써봤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정숙’ 내 이름이 도서관에 크게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책을 좋아했던 나는 도서관에 내 이름이 붙어있는 게 싫지 않았다. 평범하게만 생각했던 이름이 달라 보였다. 한자를 몰랐던 탓에 조용하고 내성적인 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한 교수가 내 이름을 유심히 보더니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었다. 일본에서는 평소에 주로 성을 부르는데 그날따라 내 이름이 눈에 띄었나 보다. 교수는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면서도 좋은 이름이라고 칭찬했다.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여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貞淑(ていしゅく-테슈쿠)을 꼽았다. 하지만 일본인 중에 ‘테슈쿠’란 이름을 본 적이 없다.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 컸나 보다.

내 이름을 지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할아버지는 내가 세상에 나오려던 순간, 추운 마당에 나와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연월일시가 딱 맞아떨어진 사주가 너무 좋아 큰 인물이 될 아이라 확신했단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길 하늘에 빌고 빌었지만,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너무 서운해서 방문을 닫고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숙(貞淑)이란 이름은 이런 사주를 거스르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사내아이에게 좋은 사주인데 내가 태어났으니, 할아버지는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여자가 밖에서 활동하기보다 집 안에서 남편을 내조하는 게 행복이라 여겼던 그 시대의 가치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범상치 않은 사주를 가지고 태어난 손녀에게 가장 여성스러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내 운명이 바뀌길 바라셨는지 모르겠다.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나의 야망과 현실에서의 괴리가 혹시 이름 때문은 아닌지, 자문할 때가 있었다. 장녀가 아닌 장남으로 태어났으면 집안에서 나에 대한 위치와 기대는 달랐을 것이고, 꿈과 도전의 방향도 달라졌을 것이다. 겉으로는 단순히 같은 이름이 너무 많아서 싫다고 했지만, 속내는 말할 수 없었다. 원래 타고난 내 사주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그럼에도 여전히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위에 돌덩이처럼 내 이름, 김정숙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게 바꾸고 싶어 했던 이름을 바꾸지 못했다. 이미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름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던 이름을 버릴 만큼 내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새 이름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그대로 살기로 했다.

그런데 소원을 이룰 기회가 다시 한번 찾아왔다.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행정적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고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등단하면서 필명을 쓰기로 한 것이다. 문단에 동일 이름이 많다는 좋은 핑계를 두르며 이 기회에 새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해성(海星), 바다 위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 벅차 했던가. 별을 쳐다보며 공상하기 좋아하고 바다에서 나는 것들을 다 좋아하는 내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바다는 그 넓은 품으로 흘러 들어오는 세상의 모든 더럽고 버려진 것들을 포용하고 수용한다. 바다가 안고 있는 수많은 사연을 낚시하듯 퍼 올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 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 주었던 별은 내게 꿈과 반짝이는 영감을 줄 것이다.

필명 문해성(文海星), 별처럼 자유롭게,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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