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글월 문, 바다 해, 별 성
- 24-05-06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글월 문, 바다 해, 별 성
드디어 이름을 바꿀 기회가 왔다. 시민권을 받게 되면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원이기도 했다. 어쩌면 시민권보다 새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가 더 컸다.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그동안 만족하지 않았던 내 이름과 안녕을 고하고 싶었다.
무슨 이름이 좋을까? 어차피 미국에 살 거라면 미국식 이름이 좋겠지. 아니야, 부르기 쉬우면서 약간 동양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으면 좋겠는데…. 막상 바꾸려 하니 맘에 딱 드는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에게 묻자, 왜 바꾸려느냐는 핀잔만 받았다. 학생들에게 내 이미지에 어울리는 이름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말해준 이름은 제니, 스테파니, 올리비아, 에리카 등등, 뭔가 낯설고 나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름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이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너무 흔하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반에도 다른 학년에도 정숙이가 많았다. 이름이 싫다며 부모에게 떼도 써봤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정숙’ 내 이름이 도서관에 크게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책을 좋아했던 나는 도서관에 내 이름이 붙어있는 게 싫지 않았다. 평범하게만 생각했던 이름이 달라 보였다. 한자를 몰랐던 탓에 조용하고 내성적인 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한 교수가 내 이름을 유심히 보더니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었다. 일본에서는 평소에 주로 성을 부르는데 그날따라 내 이름이 눈에 띄었나 보다. 교수는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면서도 좋은 이름이라고 칭찬했다.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여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貞淑(ていしゅく-테슈쿠)을 꼽았다. 하지만 일본인 중에 ‘테슈쿠’란 이름을 본 적이 없다.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 컸나 보다.
내 이름을 지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할아버지는 내가 세상에 나오려던 순간, 추운 마당에 나와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연월일시가 딱 맞아떨어진 사주가 너무 좋아 큰 인물이 될 아이라 확신했단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길 하늘에 빌고 빌었지만,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너무 서운해서 방문을 닫고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숙(貞淑)이란 이름은 이런 사주를 거스르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사내아이에게 좋은 사주인데 내가 태어났으니, 할아버지는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여자가 밖에서 활동하기보다 집 안에서 남편을 내조하는 게 행복이라 여겼던 그 시대의 가치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범상치 않은 사주를 가지고 태어난 손녀에게 가장 여성스러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내 운명이 바뀌길 바라셨는지 모르겠다.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나의 야망과 현실에서의 괴리가 혹시 이름 때문은 아닌지, 자문할 때가 있었다. 장녀가 아닌 장남으로 태어났으면 집안에서 나에 대한 위치와 기대는 달랐을 것이고, 꿈과 도전의 방향도 달라졌을 것이다. 겉으로는 단순히 같은 이름이 너무 많아서 싫다고 했지만, 속내는 말할 수 없었다. 원래 타고난 내 사주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그럼에도 여전히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위에 돌덩이처럼 내 이름, 김정숙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게 바꾸고 싶어 했던 이름을 바꾸지 못했다. 이미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름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던 이름을 버릴 만큼 내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새 이름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그대로 살기로 했다.
그런데 소원을 이룰 기회가 다시 한번 찾아왔다.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행정적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고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등단하면서 필명을 쓰기로 한 것이다. 문단에 동일 이름이 많다는 좋은 핑계를 두르며 이 기회에 새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해성(海星), 바다 위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 벅차 했던가. 별을 쳐다보며 공상하기 좋아하고 바다에서 나는 것들을 다 좋아하는 내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바다는 그 넓은 품으로 흘러 들어오는 세상의 모든 더럽고 버려진 것들을 포용하고 수용한다. 바다가 안고 있는 수많은 사연을 낚시하듯 퍼 올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 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 주었던 별은 내게 꿈과 반짝이는 영감을 줄 것이다.
필명 문해성(文海星), 별처럼 자유롭게,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15일 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대한산악회 15일 토요산행
- 삼성 이재용, 시애틀서 아마존 CEO만나
- “한인상공인 여러분,그랜트나 대출기회 넘쳐요”
- “22일 베냐로야홀서 무료 공연 즐기세요”
- “전주서 열리는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신청하세요”
- 한인학부모회 미술대회서 리아 최,엠마 양 ‘대상’
- 서북미문인협회 20회 뿌리문학신인작가상 공모한다
- 창발 한인들 참여하는 자선기금마련 테니스대회 개최한다
- “시애틀 한인여러분, 호주와 뉴질랜드여행 어때요?”
- 한국학교서북미협의회, 5개 행사 종합시상식 열어(+화보)
- 이번 주말 제74주년 6ㆍ25 합동기념식 열린다
- 재미대한탁구협회 회장배 대회 열린다(+영상)
- 시애틀 통일골든벨 ‘성공’…김환희군 1등 영광 차지(+영상,화보)
- <속보> 오늘 정부납품 세미나서 한인상공인 위한 플렉스 펀드도 설명
- [신앙칼럼-최인근 목사] 기다림의 미덕(美德)
- 오리건 김성주의원 차남 미 공군사관학교 졸업
- “윤혜성 교장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 타코마한인회, KWA‘비지니스 활성화 그랜트신청’돕기로
- 시애틀 한인마켓 주말세일정보(6월 7일~ 6월 10, 6월 13일)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8일 토요산행
시애틀 뉴스
- 아마존 시애틀 등 서민주택사업에 14억달러 추가 투자한다
- 올 여름에도 시애틀 '누드비치 공원' 그대로 운영된다
- 삼성 이재용, 시애틀서 아마존 CEO만나
- 시애틀 매리너스 23년만에 디비전 1위 노린다
- "타코마 교차로 위험 알고도 방치해 6명 사망"(영상)
- 애완견 데리고 캐나다 가는 것 어려워진다
- <속보> 지난 주 사망한 유명 워싱턴주 우주인 앤더스 사망원인은 ‘타박상’
- MS-애플-엔비디아 시총 1위 두고 사투…‘시총 삼국지’
- 억울한 살인죄 뒤집어쓰고 23년 복역했지만 "보상은 안돼"
- 시애틀 차이나타운 전 베트남마켓 건물서 화재 발생
- 스타벅스 '단골도 등돌려'...좋은 시절 끝났나
- 시애틀지역 세입자 강제퇴거 소송 빨라진다
- 킹 카운티 홈리스 업무수장 돌연 해고돼 '논란'
뉴스포커스
- "희대의 조작사건" "법치 파괴 공작"…여야, 이재명 추가기소 공방
- 서울의대 교수 비대위 "17~22일 교수 529명 휴진…54.7% 해당"
- 서울광장 떠나는 이태원 분향소…유가족·시민들 "진상 규명" 한목소리
- '김호중 뺑소니' 택시 기사 "한 달 만에 겨우 연락…운전대 잡을 엄두 안 나"
- 유럽행 고장 나자 오사카행 승객 태웠다…'11시간 지연' 그 비행기 시끌
- 日아사히 "니가타현 역사에 '사도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기록"
- '병원 뺑뺑이'로 위급했던 50대…의료원장이 직접 수술, 생명 구했다
- "60세면 한창 일할 나이죠"…고령화에 '실버 일꾼' 급증
- 의대생 유급 막는다…'1학기 미이수 과목' 2학기에 추가 개설
- 보건노조 "우리가 욕받이냐…예약 취소 업무, 의사가 직접 해라"
- "국민연금도 나누자"…이혼 후 '분할연금' 신청 10년새 6.5배 증가
- 오사카행 티웨이항공 11시간 지연…310명 중 204명 출국 포기
- ‘훈련병 얼차려 사망’ 중대장‧부중대장 피의자 소환조사
- '명품백 의혹' 최초 폭로 기자, 경찰 조사 출석 "디올백 돌려달라"
- 박세리 아빠 '3000억 꿈' 날렸다…'서류 위조' 새만금 레저 사업권 박탈
- "'비서 성폭행' 안희정 8347만원 배상"에 김지은 항소…안희정은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