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미 좋은 시-윤석호] 떨고 있을 때

윤석호 시인(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떨고 있을 때

 

사직을 권고받고 그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었다 한기가 들면 속에 것 아무거나 불을 붙이고 아무 데서나 떨림을 피워 올렸다 술자리에서도 그는 떨었다 테이블이 떨렸고 술잔이 떨렸고 합석한 사람들도 함께 떨었다 ‘더 태울 게 없어 한동안 동면해야 할 것 같아’ 그가 달그락거리며 귀가한다

더는 음을 조절할 수 없어요 조율사가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과 함께 백 년도 넘은 피아노를 토막 내 쓰레기통에 버린다 내부는 음표 대신 쉼표가 가득하다 손가락질당한 건반과 밟힌 페달은 어쩔 수 없지만 속은 아직 희고 탱탱하다 강철 프레임이 백 년의 떨림에 시달리며 포자를 피워 올리고 있다

전화기 속 음성이 떨린다 목소리가 뒤집어지며 가성의 영역을 들락거린다 ‘전주만 들어도 가슴 뛰는 노래가 있잖아요 어떻하겠어요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유리그릇에 랩을 씌우고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금방 북이 된다 팽팽하면 음이 높아지고 유쾌해진다 엄마는 요즘 유쾌하다 랩이 느슨해진 그릇 속 과일은 쉽게 녹이 슨다 나는 녹슬었다 엄마의 새 애인은 꼭 사위 같다 나는 떨며 장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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